시와 憧憬 988

박준의 시배달 / 김정환, 「서시」

박준의 시배달 / 김정환, 「서시」 김정환 ┃「서시」을 배달하며 서시는 윤동주 시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리가 읽는 대부분의 책에는 서시가 적혀 있습니다. 시집에서 머리말 역할을 하는 시를 우리는 서시라고 부르니까요. 물론 꼭 시집이 아니어도 짧게 쓰인 책의 서문은 종종 시처럼 읽히니까요. 시인이나 작가들이 합의를 한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서시는 자기 반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반성인 동시에 다짐의 글이 되기도 합니다. 시인 김수영은 1957년 「서시」를 쓰며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尖端)의 노래만을 불러왔다”라며 반성했고 시인 민영은 역시 「서시」라는 시에서 “나 혼자 남으리라 남아서 깊은 산 산새처럼 노래를 부르리라 긴 밤을 새워 편지를 쓰리라”하는 약속을 합니다. ..

시와 憧憬 2021.12.03

시배달 / 현택훈, 「캠프파이어」

시배달 / 현택훈, 「캠프파이어」 현택훈, 「캠프파이어」 현택훈 ┃「캠프파이어」을 배달하며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한번씩 번갈아가며 문장의 앞뒤 주어를 바꿔 말하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야영지는 바닷가였지”라고 적은 뒤에 “바닷가는 우리의 야영지였지”라 적고, “파도 소리가 못다 한 이야기를 데리고 갔네”라는 문장 다음에는 “못다 한 이야기는 파도 소리가 데리고 갔네” 이렇게 다시 앞뒤를 바꿉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과 글은 순서를 바꾼다고 해서 의미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간혹 도치법(倒置法)처럼 강조의 의미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요. 하지만 저는 우리가 은연중 사용하는 말의 순서에는 미세한 마음의 결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날이 춥다, 보고 싶어’라는 문장이 ‘보고 ..

시와 憧憬 2021.11.19

박준의 시배달 / 이창기, 「心境(심경)12-

박준의 시배달 / 이창기, 「心境(심경)12- 이창기 ┃ 「心境(심경)12- 허수아비」을 배달하며 그를 보았습니다.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 스치듯 바라본 모습이지만 늘 입던 잠바와 자주 쓰던 색 바랜 모자, 그가 분명합니다. 몇 해 전 화투놀이 끝에 사이가 요원해진 친구.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은 이 서먹하고 먼 마음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버스를 멈춰 세웁니다. 서둘러 내립니다. 조금 전 지나온 길을 되돌아 밭고랑 사이를 건너 친구에게 향합니다. 이 순간 작품 속 인물에게는 무슨 생각들이 스쳐 지났을까요. 어떤 말들을 내려 앉혔다가 다시 날려보냈을까요.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냐고 운을 뗄까요? 오래 전 격조했던 일을 두고 사과를 할까요. 아니면 이 사람아 왜 이런 땡볕에 일을 하냐고 걱정어린 핀잔부터..

시와 憧憬 2021.11.16

박준의 시배달 - 박은지,「생존 수영」

박준의 시배달 - 박은지,「생존 수영」 박은지 ┃「생존 수영」을 배달하며 자유형이나 평영 접영 배영 등 다른 수영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특정한 지점까지 최대한 빨리 도착하거나 더 멀리 헤치고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머무는 것. 다급함 없이 최소한의 힘을 쓰는 것. 숨을 쉬는 것. 그러다 여력이 닿으면 누구를 도울 수도 있는 것. 이것이 생존 수영의 목표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눕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고는 숨을 뱉었다가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생존 수영은 “별일 아니라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 수영법이 꼭 사는 법처럼 생각됩니다. 빠르게 헤치고 나아갈 힘도 남아 있지 않고, 내가 닿아야 할 곳도 보이지 않지만 오늘도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시와 憧憬 2021.10.21

시배달 박준 / 신용목, 「밤」

시배달 박준 / 신용목, 「밤」 신용목 ┃「밤」을 배달하며 저녁의 시간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부터가 저녁이며, 또 언제까지를 저녁이라 할 것인가? 하는 조금 쓸데없는 물음에서 시작이 된 말들이었습니다. 제 친구는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이 저녁의 시작이며, 더는 어두워질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을 때가 저녁의 끝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저는 저녁밥으로 무엇을 먹을지, 먹는다면 누구와 먹을지 고민을 하는 순간부터 저녁이 시작되며, 밥을 다 먹고서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두었을 때쯤 저녁이 끝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각자 내어놓은 답의 우열을 가를 필요는 없었지만, 재미삼아 사전에서 저녁이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저녁; 해가 질 무렵부터 밤이 되기까지의 사이.’ 사전적 정의라고 하기에는 다..

시와 憧憬 2021.10.07

박준의 시배달 - 장석남, 「별의 감옥」

박준의 시배달 - 장석남, 「별의 감옥」 장석남 ┃「별의 감옥」을 배달하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얼마 전 부탁을 받았습니다. 2학기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소개하면 좋을 시를 한 편 추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저는 밝고 진취적인 의미를 담은 시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다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학생들이 이미 희망적인 감정의 자극에 지쳐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제가 학생이던 시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첫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어떤 시를 소개해주시면 좋을까? 하고요. 시의 전문이 다 눈에 들어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시의 전문이 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어도 무엇인가 근사하고 강..

시와 憧憬 2021.09.23

시배달 - 최정례, 「가물가물 불빛」

최정례, 「가물가물 불빛」 최정례 ┃「가물가물 불빛」을 배달하며 사랑은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관계의 죽음이든 육체의 죽음이든 별리(別利)는 그간 나눈 모든 것들을 땅속 깊이 묻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이곳에서도 사랑의 시간은 다른 형태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당신과 이젠 끝이다 생각”한 이후에도 한동안 불빛이 펄럭이는 것처럼. 사위고 쓰러지고 무너지는 것들로 가득한 와중에서도 썩지 않는 어금니 하나가 반짝 빛을 내는 것처럼. 이 작은 빛은 또 얼마나 유구한 시간을 혼자 헤매게 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모든 것들 위로 “새풀”이 돋고 “삐죽삐죽 솟고 무성해”지는 때가 분명히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쯤 가면 우리도 “당신 나 잊고 나도 당신 잊고” 하고 말해..

시와 憧憬 2021.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