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찔레꽃」(낭송: 안도현)
찔레꽃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실천문학』, 2006년 여름호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2009년 문학과 지성사
● 송찬호,「찔레꽃」을 배달하며
다 제쳐두고 이 시의 두 번째 연을 읽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합니다. 슬픈 노래도 행복한 귀로 들을 수 있듯이 당신도 저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깊은 절망을 통과한 뒤에 가까스로 얻게 되는 행복입니다.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온몸을 저리게 만드는 절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썹과 초승달의 비유는 일찍이 미당이 선점한 것이지만 시인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비경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문학집배원 안도현 2007-05-14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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