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김선우,「입설단비(立雪斷臂)」(낭송: 본인)

cassia 2016. 11. 1. 12:36

김선우,「입설단비(立雪斷臂)」(낭송: 본인) 

 

 

입설단비(立雪斷臂)

 

김 선 우)

 
2조(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도(道) 공부 하기를 청했다는데
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
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
아름다운 것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
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
그가 흘린 피로 따듯하게 녹아 있는
동그라한 아침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마리
종종 걸어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
작은 새의 부리가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
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을 뿐

 

그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
파묻힐 듯 어느 흰눈 오시는 날
마다 않고 흰눈을 맞이하여 그득그득 견디어주다가
드디어는 팔뚝 하나를 잘라들고
다만 고요히 서 있어 보고 싶은 것이다


작은 새의 부리에 손마디 하나쯤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 김선우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시선 229)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2003


김선우,「입설단비(立雪斷臂)」를 배달하며


쌓인 눈에 팔뚝 같은 가지가 잘린 나무를 봅니다. 그 나무를 보며 달마대사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자기 팔뚝을 잘라 바쳤다는 선가의 두 번째 스승 혜가선사를 떠올립니다. 화자도 우리도 그런 고승처럼 독한 비원을 가진 인물은 못 되고, 그저 아름다운 것의 슬픔을 아는 사람과 밤늦도록 술잔이나 나누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의 생을 향해 파묻힐 듯 쏟아지는 흰눈 오는 날. 나도 흰눈을 마다하지 않고 서서 견디다가 팔 하나를 잘라들고 서 있어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 내 생의 겨울 앞에 서 있어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문학집배원 도종환 2007-01-29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