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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의 시배달 - 박은지,「생존 수영」

박준의 시배달 - 박은지,「생존 수영」 박은지 ┃「생존 수영」을 배달하며 자유형이나 평영 접영 배영 등 다른 수영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특정한 지점까지 최대한 빨리 도착하거나 더 멀리 헤치고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머무는 것. 다급함 없이 최소한의 힘을 쓰는 것. 숨을 쉬는 것. 그러다 여력이 닿으면 누구를 도울 수도 있는 것. 이것이 생존 수영의 목표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눕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고는 숨을 뱉었다가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생존 수영은 “별일 아니라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 수영법이 꼭 사는 법처럼 생각됩니다. 빠르게 헤치고 나아갈 힘도 남아 있지 않고, 내가 닿아야 할 곳도 보이지 않지만 오늘도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시와 憧憬 2021.10.21

[정민의 世說新語] [645] 뒷간거리의 가무락조개

[정민의 世說新語] [645] 뒷간거리의 가무락조개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백석 시 ‘가무락조개’는 모시조개의 다른 이름이다. 시는 “가무락조개 난 뒷간거리에 빚을 얻으려 나는 왔다”로 시작된다. 빚을 못 얻고 되돌아오는 길, 팔리지 않은 채 그대로 놓인 뒷골목 시장의 가무락조개를 보며 시인은 “가무래기도 나도 모두 춥다”고 했다. 그다음 구절이 이상하다. “추운 거리의 그도 추운 능당 쪽을 걸어가며 내 마음은 우쭐댄다. 그 무슨 기쁨에 우쭐댄다.” 여기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그’가 시의 바른 해독을 방해한다. 가무래기 이야기를 하다가 ‘그’를 말했으니, 주어가 그인지 내 마음인지 파악이 어렵다. 가무락조개가 어떻게 걸어가나? 그걸 보고 내가 우쭐댈 수 있나? 찾아보니 친구에게 돈을 못 빌리고, 가..

鄭珉 世說 2021.10.21

문장배달 편혜영 / 김유원, 「불펜의 시간」 중에서

문장배달 편혜영 / 김유원, 「불펜의 시간」 중에서 김유원, 「불펜의 시간」 중에서 김유원 ┃「불펜의 시간」을 배달하며 야구를 잘 모르지만 친구를 따라 야구장에 가본 적 있습니다. 응원하는 무리에 섞여 타자가 친 공이 떠오르는 걸 지켜보노라니, 야구는 공이 그리는 아름다운 포물선을 보기 위한 경기가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파울볼이나 뜬공을 보는 것도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야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딱히 응원하는 팀이 없어서 해본 생각이겠지요. 프로 스포츠니까 당연히 야구는 승부를 내야만 합니다. 이긴 팀이 있으면 지는 팀이 있고, 동점이 되면 연장전에 돌입해서라도 승패를 결정 짓습니다. 당황스럽게도 주인공 혁오는 경기에서 이기는 것을 피하고자 일부러 볼넷을 던져왔습니다. 남들은 선발투수가..

책 한누리 2021.10.14

[정민의 世說新語] [644] 굳고 곧은 갈매나무

[정민의 世說新語] [644] 굳고 곧은 갈매나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부임했다.(왼쪽)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여성' 3권3호(1938년3월)에 실렸던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삽화는 당대의 전설적 삽화가·장정가이자 출판미술의 개척자인 정현웅의 그림이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은 쓸쓸한 시다. 남신의주 유동의 박시봉이란 목수 집 문간방에 부쳐지낼 때 썼다. 삿(삿자리)을 깐 추운 방에 틀어박혀 슬픔과 한탄 같은 것들이 모두 앙금이 되어 가라앉을 때쯤 해서 창호문을 치는 싸락눈 소리를 듣다가 그는 이렇게 되뇐다.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連載 칼럼 2021.10.14

시배달 박준 / 신용목, 「밤」

시배달 박준 / 신용목, 「밤」 신용목 ┃「밤」을 배달하며 저녁의 시간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부터가 저녁이며, 또 언제까지를 저녁이라 할 것인가? 하는 조금 쓸데없는 물음에서 시작이 된 말들이었습니다. 제 친구는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이 저녁의 시작이며, 더는 어두워질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을 때가 저녁의 끝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저는 저녁밥으로 무엇을 먹을지, 먹는다면 누구와 먹을지 고민을 하는 순간부터 저녁이 시작되며, 밥을 다 먹고서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두었을 때쯤 저녁이 끝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각자 내어놓은 답의 우열을 가를 필요는 없었지만, 재미삼아 사전에서 저녁이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저녁; 해가 질 무렵부터 밤이 되기까지의 사이.’ 사전적 정의라고 하기에는 다..

시와 憧憬 2021.10.07

[정민의 世說新語] [643] 말 주머니...,

[정민의 世說新語] [643] 말 주머니를 잘 여미면 허물도 없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78세 나던 1664년에 주부 권념(權惗)이 편지를 보내 윤선도의 과격한 언행을 심하게 질책했다. 윤선도가 답장했다. “주신 글을 잘 보았소. 비록 일리는 있다 하나 어찌 매번 이처럼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말하시는가? ‘주역’에 ‘주머니를 묶으면 허물이 없다(括囊無咎)’고 했고, 전(傳)에는 ‘행실은 바르게 하고 말은 겸손하게 한다(危行言遜)’고 했소. 자기에게 잘못이 없어야 남을 비난한다는 것이 지극한 가르침이긴 하오. 하지만 내가 이를 했던 것은 선왕의 남다른 예우를 추념하여 지금의 전하께 보답하고자 해서,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오. 모름지기 자세히 살..

鄭珉 世說 2021.10.07

편혜영의 문장배달 -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

편혜영의 문장배달 -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 「번번이」 중에서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 「번번이」 중에서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 「번번이」 를 배달하며 이 작품은 원제인 'Time and again'을 ‘번번이’라고 번역해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번번이’는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될 때 사용하는 부사입니다. 빈도를 나타내는 말이면 ‘여러 번’도 있고 ‘매번’이나 '몇 번이고'도 있는데, 어째서 ‘번번이’를 제목으로 삼았을까요. 표준국어대사전의 용례를 참고하면 이 말에는 '약속을 번번이 어기다'나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다'와 같이 어떤 일의 실패가 되풀이된다는 뉘앙스가 담긴 듯 합니다. 여러 부사 중에서 어째서 ‘번번이'를 제목으로 삼았을지 작품을 읽으면서 짐작해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좋은 소설은 여러 말..

책 한누리 2021.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