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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世說新語] [642] 무성요예(無聲要譽)

[정민의 世說新語] [642] 무성요예(無聲要譽)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상황(李相璜·1763~1841)이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갔다. 어둑한 새벽 괴산군에 닿을 무렵, 웬 백성이 나무 조각에 진흙을 묻혀 꽂고 있었다. 수십 보를 더 걸어가 새 나무 조각에 진흙을 묻히더니 다시 이를 세웠다. 이렇게 다섯 개를 세웠다. 어사가 목비(木碑)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게 무언가?” “선정비(善政碑)올시다. 나그네는 저게 선정비인 줄도 모르신단 말씀이오?” “진흙칠은 어째서?” 그가 대답했다. “암행어사가 떴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방이 저를 불러 이 선정비 열 개를 주더니, 동쪽 길에 다섯 개, 서쪽 길에 다섯 개를 세우랍디다. 눈먼 어사가 이걸 진짜 선정비로 여길까봐 진흙을 묻혀 세우는 게지요.”..

鄭珉 世說 2021.09.30

박준의 시배달 - 장석남, 「별의 감옥」

박준의 시배달 - 장석남, 「별의 감옥」 장석남 ┃「별의 감옥」을 배달하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얼마 전 부탁을 받았습니다. 2학기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소개하면 좋을 시를 한 편 추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저는 밝고 진취적인 의미를 담은 시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다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학생들이 이미 희망적인 감정의 자극에 지쳐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제가 학생이던 시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첫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어떤 시를 소개해주시면 좋을까? 하고요. 시의 전문이 다 눈에 들어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시의 전문이 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어도 무엇인가 근사하고 강..

시와 憧憬 2021.09.23

[정민의 世說新語] [641] 만리비추 (萬里悲秋)

[정민의 世說新語] [641] 만리비추 (萬里悲秋)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민둥산억새축제. 산의 이름처럼 정상에는 나무가 없고, 드넓은 주능선 일대는 참억새밭이다. “바람 급해 하늘 높고 잔나비 파람 슬픈데, 물가 맑아 모래 흰 곳 새들 날아 돌아오네. 가없이 지는 잎은 우수수 떨어지고, 다함 없는 장강은 넘실넘실 흘러온다. 만리에 가을 슬퍼 늘 나그네 되었으니, 백년 인생 병 많은데 홀로 대에 오르누나. 고생으로 터럭 셈을 괴롭게 한하노니, 쇠한 몸 탁주 술잔 새롭게 멈춘다네(風急天高猿嘯哀, 渚清沙白鳥飛回.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艱難苦恨繁霜鬢, 潦倒新停濁酒杯).” 두보의 절창 ‘등고(登高)’ 전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바람이 빠르고 하늘이 높고 잔나비 파람..

鄭珉 世說 2021.09.23

문장배달 / 최유안, 「보통 맛」 중에서

문장배달 / 최유안, 「보통 맛」 중에서 최유안 「보통 맛」을 배달하며 누군가의 후배일 때, 우리는 자주 ‘그런 선배’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치졸하게 굴고 쉽게 잔소리하고 싫은 말을 참지 않는 사람이 대개는 ‘그런 선배’가 되지요. 하지만 일단 선배가 되고 나면 속 좁게 굴기는 너무 쉽습니다. 어느새 후배의 못마땅한 점이 눈에 많이 띄고, 내가 저 나이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자니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면서 매사 지적하고 싶은 것이 많아집니다. 그런 마음을 힘겹게 눌러 참거나, 참지 못하고 화를 낸 후에는 한없이 씁쓸해지기 마련입니다. 나 역시 어느새 그저 ‘그런 선배’가 되어버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저마다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음식도 회사 점심 시간에 쫓기듯 먹으면 별다른 것 ..

책 한누리 2021.09.17

[정민의 世說新語] [640] 우두마면 (牛頭馬面)

[정민의 世說新語] [640] 우두마면 (牛頭馬面)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능엄경(楞嚴經)’을 본떠 의림도인(義林道人)에게 불교의 폐해를 말한 글이 있다. ‘증의림도인효능엄경(贈義林道人效楞嚴經)’이 그것이다. 그중의 한 단락. “의림이여! 이제 세간을 살펴보면 선악에 대한 보답이 일정치가 않아 끝내 허망한 데로 돌아가고 말았다네. 부처가 열반에 든 뒤 오랜 세월이 쌓인지라 정신이 신령치 않아, 들어도 알지를 못하기 때문일세. 천당에 줄지어 선 염라의 여러 관원들은 사적인 청탁을 들어주며 몰래 뇌물을 받고, 소 대가리같이 생긴 나찰(羅刹)과 말의 낯짝을 한 나졸들은 조종하고 기만함이 오로지 뇌물의 많고 적음만을 따른다네. 저승의 법도가 드러나지 않음이 옛날과는 다르..

鄭珉 世說 2021.09.16

시배달 - 최정례, 「가물가물 불빛」

최정례, 「가물가물 불빛」 최정례 ┃「가물가물 불빛」을 배달하며 사랑은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관계의 죽음이든 육체의 죽음이든 별리(別利)는 그간 나눈 모든 것들을 땅속 깊이 묻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이곳에서도 사랑의 시간은 다른 형태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당신과 이젠 끝이다 생각”한 이후에도 한동안 불빛이 펄럭이는 것처럼. 사위고 쓰러지고 무너지는 것들로 가득한 와중에서도 썩지 않는 어금니 하나가 반짝 빛을 내는 것처럼. 이 작은 빛은 또 얼마나 유구한 시간을 혼자 헤매게 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모든 것들 위로 “새풀”이 돋고 “삐죽삐죽 솟고 무성해”지는 때가 분명히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쯤 가면 우리도 “당신 나 잊고 나도 당신 잊고” 하고 말해..

시와 憧憬 2021.09.09

[정민의 世說新語] [639] 선모신파(鮮侔晨葩)

[정민의 世說新語] [639] 선모신파(鮮侔晨葩)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추사 김정희의 현판 글씨 '선모신파(鮮侔晨葩)'. 20009년 당시 서울 관훈동 우림화랑이 근대 고서화 작품 140점(글씨 55점, 그림 75점)으로 '묵향천고(墨香千古)-신록의 향연' 전을 열 때 공개된 사진. /우림화랑 글씨도 글씨지만 적힌 내용에서 쓴 사람의 학문과 품격을 만날 때 더 반갑다. 어떤 작품은 필획에 앞서 글귀로 먼저 진안(眞贋)이 판가름 나기도 한다. 추사의 ‘선모신파(鮮侔晨葩)’ 현판을 보았을 때 그랬다. 찾아보니 이 구절은 진(晉)나라 속석(束皙)의 ‘보망시(補亡詩)’ 연작 중 ‘백화(白華)’ 시의 제3연에 들어있다. “백화의 검은 뿌리, 언덕 굽이 곁에 있네. 당당한 아가씨는 꾀함 없고 욕심 없어. 새벽..

鄭珉 世說 2021.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