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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한국 어린이의 놀이 '태껸'..."이크, 에크"

cassia 2006. 1. 13. 01:02

100년전 한국 어린이의 놀이 '태껸'..."이크, 에크"

 


1900년대 초 이미지로 보는 코리아니티(koreanity, 한국성) - 3

미디어다음 / 김준진 기자

100년 전 이 땅의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 자치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등 흔히 알려진 것 이외에 ‘태껸’이 100년 전 어린이들의 주된 놀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가 나왔다.

이돈수(미술사학자)씨가 20년 넘게 수집했던 이미지 가운데 아이들이 태껸을 하는 사진 두 장이 이를 추측게 하고 있다. 그 중 한 장은 1908년 엽서 사진으로 ‘한국 어린이의 놀이’라는 영어 제목이 달렸다. 나머지 한 장도 19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씨에 따르면 1900년 전후 태껸 관련 사진으로 어른의 것은 아직까지 발굴된 것이 없다고 한다.

태껸은 주로 발을 사용해 상대를 차서 쓰러뜨리는 우리나라 전통의 맨손 무예다. 태권도와는 역사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별개의 것이다. 그 기원이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태껸은 일제 강점기하에서 민족무예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아 거의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조선후기 태껸꾼 고 송덕기 옹에 의해 되살아나 맥을 이어왔다.

이돈수 씨는 “문화의 큰 줄기인 영화의 최신 경향을 보면 서양은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최근의 나니아연대기까지 ‘판타지’가 주류이고 동양은 칠검, 무극 등 ‘무예’를 주로 다루고 있다”며 “한류의 근원도 문화임을 고려할 때 전통의 재창조가 문화 분야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다음은 이씨가 소장해 온 이미지들을 통해 ‘한국인의 한국인다움(Koreanity) - 한국인의 문화’에 대해 재조명해 본다.

기사에 소개된 사진과 이미지들은 주로 1900~1930년대의 것들로서 일부만 정확한 연도 파악이 가능했다. 이들 가운데 채색된 것은 당시에 엽서로도 사용됐던 것들이다.

 

100년 전 한국 어린이의 놀이 - 태껸
‘한국 어린이의 놀이’라는 영어 제목이 달린 1908년 엽서 사진. 아이들의 모양새가 영락 없는 태껸의 모습이다.

옹기종기 태껸
19세기 말 사진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에서는 아이들의 태껸 품세가 더욱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한 동네에 사는 듯한 아이들이 모여 구경을 하는 풍경도 이채롭다.

최고 인기 스포츠 '씨름'
씨름도 한국인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가장 인기있던 스포츠 종목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프로팀 해체와 주관 방송사의 방송 중단 등 민속씨름의 침체된 한숨은 아직 사라지지 않을 기세다. 민속씨름은 내년 설을 기점으로 그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민족의 피 '활'
한국 양궁 선수들이 올림픽과 각종 세계대회를 재패할 때마다 전 세계 언론은 "한국인에게는 양궁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궁술을 장려해 왔고 이에 활을 쏠 수 있는 장소만 있으면 누구나 이를 즐겼다고 한다.

온 가족이 함께 '널뛰기'
널뛰기를 즐기고 있는 여인들. 온 가족이 모여 이를 지켜보고 있다.

춤의 선구자 '최승희'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현대적 기법의 춤을 창작, 공연한 최초의 인물로 1945년 해방 이전의 한국무용계를 주도했던 최승희.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하던 당시 촬영한 사진으로 최승희가 직접 사인을 남겼다.

종합예술인 '기생'
춤을 추고 있는 기생의 모습. 고려시대부터 기원한 기생제도는 처음에는 국가에 소속된 노비였다. 이에 장악원이라는 관청에서 노래, 춤, 악기를 배우는 한편 시조, 가무, 한문, 시, 서 등 5과목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았다. 이후 조선시대 신분제 사회에서 기생은 양반 사회 주변에서 양반과 함께 문장과 음악을 나누며 종합예술인 여성집단으로 머물렀다.

탈춤 추는 사람들
탈춤을 추는 사람들. 탈춤은 가면무용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에 유행한 황창랑(黃倡郞)의 검무(劒舞)와 처용무(處容舞)·무애무(無 舞) 및 신라 오기(五伎)인 월전(月顚)·금환(金丸)·속독(束毒)·산예( 猊)·대면(大面) 등이 궁중무용으로 전해지고, 이들이 고려·조선 시대에 이르러 민속무용으로 크게 발전했다.

자연일까, 아닐까..
절벽 위 나무 옆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저 정자는 자연일까, 아닐까. 충남 부여에 있는 '대재각'은 크거나 요란하지 않고 단아한 자세로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제비집? 암자?
금강산 분설담 오른쪽 법기봉의 중턱에 제비집처럼 걸려있는 3층 짜리 암자 '보덕암'. 최초의 건물은 고구려시대(AD 627년)에 세워졌고, 지금의 것은 17세기에 재건된 것이다. 20m가 넘는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7.3m 길이의 구리 기둥 하나로 받쳐져 있는 이 암자는 바람이 불거나 네댓명이 마루 바닥을 걸으면 삐걱거리며 흔들린다고 한다. 하지만 300년이 넘은 오늘까지 한치도 기울어지지는 않은 기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왜장 암살한 계월향의 '혼'
북측 평양의 대동강변에 있는 연관정. 평양 8경, 관서 8경의 하나로 평양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꼽힌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장을 암살한 기생 계월향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귀부인의 외출
귀부인의 외출복. 어김없이 외출용 모자를 쓰고 있다.

양반 아이들 옷
양반집 아이들 의복.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양반과 서민의 의복은 많은 차이가 있엇다.

결혼식 예복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혼은 필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결혼식순 가운데 하나인 폐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랑과 신부의 예복은 현재와 과거가 닮은 꼴이면서도 색감과 모양 등에서 다소 다른 점들이 보인다.

 

이돈수 씨가 말하는 한국인의 문화란?

▲ 다양한 놀이와 스포츠
태껸 이외에 한국인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가장 인기있던 스포츠 종목은 씨름이었다.

씨름은 ‘민속씨름’으로 불리며 몇 년 전까지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LG 씨름단의 해체 이후 8개 팀까지 번창했던 프로팀이 2개로 줄어들었다. 올해에는 주관 방송사 KBS가 중계방송을 포기하는 바람에 반 년 동안 대회가 중단되는 등 명맥 유지에 위기를 맞았다.

또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무예 정신의 하나로 주저 없이 꼽히는 활. 중국은 창, 일본은 검을 내세운다. 삼국시대 이후 활이 전쟁에서 큰 위력을 나타내면서 역대 어느 왕조든 궁술을 장려, 활쏘기는 신분의 귀천과 문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이 함께 즐긴 국민 무예가 됐다. 하지만 이 마저 올림픽과 각종 세계대회에서나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조상이 즐겼던 놀이로 조상의 얼과 슬기, 생활모습, 풍습 등의 발자취가 그대로 담겨 있는 역사적 소산물인 민속놀이가 차츰 그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맹목적으로 외래의 것을 추구하기보다 우리의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봄직 하다.

▲ 춤과 소리의 민족
판소리나 사물놀이에 저절로 어깨가 들썩여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한국인이다.

한국인은 춤과 소리의 민족이다. 옛 중국 문헌인 삼국지위지 동이전에서도 한국인을 유달리 노래를 즐기고 춤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춤과 소리는 함께 모여 흥을 내며 정을 돈독히 하고 신명나게 한을 풀며 서로 공감하는 전통적인 삶의 훌륭한 도구이자 방식이었다. 이는 서양이나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춤과 소리이다.

▲ 자연과 건축의 조화
우리나라 건축은 목조 건축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 지방에서 풍부하게 생산됐던 소나무가 주된 건축자재로 쓰였기 때문이다. 소나무가 갖는 재질의 특성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성격이나 취향, 습성과도 많이 닮았다.

또 다른 특징은 전 국토의 70%가 산지라는 지형적 특성에 맞춰 건축물의 규모가 단층 위주로 작은 편이 많고 주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주로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고 주변 경관의 허점을 보완하고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지어졌다. 이는 건물 내부에서도 잘 나타난다. 내부는 기능성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부가 장식을 많이 하지 않고 되도록 간결하고 담백하게 장식했다.

이 같은 우리 건축물의 특징은 중국의 위압적·독존적인 것과 일본의 규격화되고 수공예적 감흥만을 노린 것들과도 확연히 구분된다.

▲ 우리옷의 색과 멋
우리 전통 패션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한복과 모자다.

한복은 일본이나 중국의 전통의상에 비해 매우 단아하고 기품을 풍긴다. 한복의 직선과 곡선 등 선에서 나오는 아름다움과 상·하체에서 보여주는 안정감, 오방색에서 나오는 색채감, 소재와 형태의 자연스러움 등은 타민족과 타국에서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자산이다.

모자도 마찬가지다. 모자는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소중한 소품이었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찾았던 외국인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도 바로 모자였다.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르 바라는 1892년 한 여행지 기고에서 “한국은 모자의 왕국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처럼 다양한 모자가 있는 나라는 없었다. 공기와 빛이 알맞게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되는 것 한국의 모자들이다”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