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아름다운 글귀 모음3

cassia 2005. 10. 29. 23:25

아름다운 글귀 모음3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매일 길을 나섰습니다. 되돌아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할 시간이 두려워 법석이는 거리로 나섰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나 쌓여진 일감을 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당신에게서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때마다 돌아왔느냐고 구태여 물으셨다면 오늘 하루만큼 떠나 있었고, 내일이면 또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당신이 어깨를 흔들며 반길 때도 웃을 수 있었다고 대답하렵니다.
<떠나는 시간에> 중에서


잡동사니 물건인데도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있어야만 된다는 욕심에서 자꾸만 삶의 짐 속에 쑤셔 넣는다. 빠뜨렸을까, 개수가 모자랄까, 남들보다 적게 장만하지는 않았는가 자꾸만 사들인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의 짐은 소풍나들이의 차림이 아니라 피난 보따리가 되었다.
<소풍놀이> 중에서


정말 긴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당신을 위한 시간이라도 못내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10년, 20년도 아니었습니다. 100년, 200년도 아니었습니다. 천년을 참았습니다. 그리고 이백여 년을 침묵으로 보냈습니다. 또 수십 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화청지에 남긴 편지> 중에서


시골 집터치고는 너무나 적은 평수였다. 고추밭 요량으로도 너무 좁은 텃밭이었다. 방이 들어앉기에는 비탈이 심했고 채소밭을 하기에도 넉넉잖은 자투리땅이었다. 탐나지도 남에게 주지도 못할 땅이었다. 팔리지도 사지도 않을 몹쓸 땅이었다.
<고추밭 생가> 중에서


그곳으로 오시려면 석양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시간을 택하십시오. 때묻지 않은 고산지대의 간이역에서 내려 부근의 하숙집에 여장을 풀면 그날 하루 당신은 마을의 화젯거리가 될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한국인도 그러한 산촌에 짐을 내린 적은 없을 테니까요.
<스코틀랜드를 아십니까> 중에서


누군가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굳이 묻는다면 억새보다 못해 산풀이 되고 싶다고 대답하겠다. 식물도감에도 실리지 못한 산풀이 되고 싶다고 침묵으로 말하겠다. 그러면 누군가 억새라도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 그토록 소망하던 산꽃이, 들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칸씩 비켜 가다 보면, 사랑을 듬뿍 받는 기화요초가 될 행운을 누군가 가질 수 있을 터이다.
<산풀이 되리라> 중에서


미국인들은 길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치면 "하이"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그것은 그냥 해보는 말이다. 의미도 감정도 내일의 약속도 없는 쭉정이 말이다. 미련도 아쉬움도 원망도 느낄 수 없는 밋밋한 말이다. 그들은 "하이"로 하루를 시작하고 "바이 바이"로 하루를 보낸다.
<가을을 데우는 눈매> 중에서


사는 것이란 이와 같은 착시의 장난일지도 모른다. 밤낮을 구분하여 전등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일상에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밤에도 밝음이 있고 낮에도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아무리 선한 자와 악한 자를 편 가름하여도 그 반대쪽에 나의 분신이 있음을 쉽사리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도 끊을 수 없는 탯줄로 이어진 하나의 세계일 뿐인데.
<연(緣)으로 오르는 길> 중에서


옅은 가슴팍 밑에 똬리를 튼 나의 심장에서 실 뿌리가 돋고 물방울이 내려앉는 양팔에서 돌기 같은 새순이 돋아나면 나는 계곡의 습기를 머금고 자라나는 한 조각 이끼가 된다.
<나의 소리만이라도> 중에서


보문 호수의 수면 위를 스쳐 온 바람이 달려와 차가운 기운을 남기면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쓴 맛, 단 맛, 매운 맛, 싱거운 맛, 때로는 밋밋하고 때로는 느끼했던 맛, 달짝하면서도 역겨운 맛을 보며 열 일곱 해를 각각 걸어온 우리에게 지나온 뒷길을 새삼 뒤돌아보게 하는 바람이다.
<재혼여행> 중에서


계절이 바뀌면 마음의 병을 가진다. 봄에는 바람이 차 오르고, 여름에는 바람이 빠지고, 가을에는 기가 약해지고, 겨울에는 만사가 애끊는다.
<동촌은 어디로> 중에서


돌하루방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떠들지도 하소연하지도 않을 것이다. 굴복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야말로 이렇게도 굽고 저렇게도 휘어지는 버려진 아이의 신세이다.
<제주도 물상> 중에서


한 점의 수석에서 기암절벽을 떠올리고, 한 그루의 분재에서 울창한 산림을 바라보고, 하나의 물줄기에서 수십 길 폭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심산유곡의 한 폭 동양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싶다. 그때서야 방을 나서고 싶다.
<어른을 위한 옛터> 중에서


어깨를 조이기만 하는 껄끄러운 양복을 훌훌 벗어 던져 버리고, 중고 자동차라도 구입하면 도로가 이어지는 대로 한껏 돌아다니고, 몸과 마음이 모두 성하다면 집안 일도 모두 잊으리라.
<귀국단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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