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아름다운 글귀 모음4

cassia 2005. 10. 29. 23:27

아름다운 글귀 모음4

 

애당초 이 세상에는 확고한 것도 영원한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를 묻지 말라. 도대체 당신은 이를 알지 못하지 않는가. 나의 의견으로는 나와의 만남은 당신에게는 불가피한 운명이다. 적어도 그대는 나의 존재를 완전히 비켜 갈 수는 없다.
<불혹에 부는 바람> 중에서


애욕이 담긴 두레박이면 조용히 물질하여 티끌을 가라앉게 하고, 물욕을 퍼낸 두레박이면 깨끗이 씻어 주고, 태만의 이끼가 떠올려진 두레박이면 힘껏 내려쳐 자성의 소리가 우물 안에 울리게 하고 싶다. 미처 감아 올리기도 전에 태반의 물이 쏟아져 버리면 성급한 자신을 탓하고, 두레박이 우물 벽에 부딪쳐 모서리에 금이 가면 물길질도 배우지 못한 미련함을 자책하고, 오직 업보만이 질퍽하게 쌓여 있는 바닥만이 드러나면 새벽 이슬을 뿌리는 밤 구름을 지켜보고 싶다.
<두레박> 중에서


남아 있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며, 머물고 있음도 또한 행운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때부터 깨닫고 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날수록 생생하게 떠오르는 너의 얼굴이 못내 안타깝고, 함께 지냈던 형제들의 뼈아픈 피멍울은 커져만 간다.
<제망제사> 중에서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싶듯이 자신의 냄새를 간직하고 싶어한다. 나이가 제법 되면 남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가지려 하듯이, 상대방을 포근하게 감쌀 수 있는 체취를 가지고 싶어한다. 여자가 봄을 타듯 중년의 남자가 한해가 구비 트는 내리막이 싫어 겨울을 못내 붙잡으려 하면, 그는 더욱 짙었으면 하는 어떤 냄새를 아쉬워한다.
<감잎을 태우며> 중에서


술을 따르는 자세가 흩어지기는커녕 더욱 곧아져서 마치 물을 뿜으면 팽팽하게 퉁겨지는 담백한 창호지를 연상시켜주는 그런 분이었다. 신통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어느 노교수의 단주(斷酒)> 중에서


봄꽃은, 산하를 새롭게 채색하는 꽃들이 아니라, 봄을 맞아들이지 못하고 죽어버린 혼들의 영혼이라는 생각이다.
<봄치례> 중에서


수평선 너머에 숨겨진 항구는 영원히 닻을 거두어들일 수 없는 자유의 흔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곳은 닻을 내릴 안식처가 해도에 표기되어 있다고 한들 화가의 마음에서만 존재하는 피안의 고도이다. 그래서 항구를 떠나는 뱃고동은 애처롭고, 귀향의 뱃고동조차 휴식의 한숨이 아니라 다시금 떠나야하는 체념의 한숨이다.
<창으로 들어온 수채화> 중에서


무엇이든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우리들도 알게 모르게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잊혀져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좋은 첫 인상으로 남의 마음을 사로잡고 재단된 허식으로 그것을 지켜나가려 하더라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자신의 빈곳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락방 서재> 중에서


달력 속의 숫자는 1월, 2월, 3월.....처럼 겉으로는 늘려가지만 보태어지거나 더해지는 숫자가 아니다. 오히려 12라는 절대치에서 줄어들 뿐이다.
<12월의 달력을 바라보며> 중에서


얼었던 땅이 촉촉하게 녹은 논둑에는 파릇한 쑥이 무성하게 돋았다. 쟁기질도 하지 않은 논바닥에서는 유품을 태우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자락 아랫동네에서는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또한 굴뚝에서 무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태양웅을 묻고 나서> 중에서


덕지덕지 화장한 얼굴로 사노라면, 기쁨이든 슬픔이든 담담하게 맞이하고 미련 없이 흘러보내노라면, 속 깊은 여인의 속살처럼 깊고 언젠가 말하고 싶은 하나의 사연이 생길지도 모른다.
<화장한 얼굴로 사노라면> 중에서


이제 당신도 부끄러움 없이 당신의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가까이 밀려오면 두 손을 벌려 나를 보듬어 안아보십시오. 저는 숨죽여 기다릴 때는 외출을 삼갑니다만 준비가 되지 않은 분에게는 재빨리 초인종을 누르곤 합니다. 마주하기도 전에 떠날 채비를 하고, 쫓아내시려 하여도 쇠종이 남기는 여운처럼 머물려는 게 저의 버릇이지요. 곁을 스쳐 지나가기만 하여도 생채기를 남기는 분을 저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답니다.
그러니 그냥 고개를 돌리려고 하지 마시고 차라리 저를 찾아 소맷자락의 단추를 풀어 보십시오.
<빗장을 열고> 중에서


강이 머물기를 염원하는 터는 낮은 땅자락이다. 시지프스의 바위가 굴러 내리기를 거부하는 산기슭 끝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구별하지 못하는 높낮이를 일일이 가려내어 한 치가 높을지라도 강은 오르기를 마다한다.
<흐르지 않는 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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