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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은 신뢰할 만하다”…문인들의 육필 원고

cassia 2005. 6. 10. 19:43

“연필은 신뢰할 만하다”…문인들의 육필 원고

 

작가 김훈·이문열의 원고지, 윤동주의 낙서, 기형도의 연습장 등
미디어다음 / 고양의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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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의 ‘참회록’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1942년 일본 유학을 준비할 무렵 쓴 시 ‘참회록’. 마지막에 한자로 1월 24일이라고 날짜를 밝혀 놓았다.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과 맞서기보다 시를 쓰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스물네 살의 젊은 시인은 부끄러움을 담은 자기고백을 또박또박 쓴 글씨로 남겼다. 원고의 하단 여백에 남겨진 ‘詩란?’ ‘文學, 生活, 生存, 生, 힘’과 같은 절절한 낙서들은 당시 시인의 고뇌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윤동주의 ‘참회록’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연필로 글쓰기를 고집하는 ...
기형도의 ‘포도밭 묘지Ⅱ’
김지하 ‘유목과 은둔’ 머...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는 게 일상화된 요즘이지만, 변함없이 손으로 원고를 쓰는 것을 고집해온 문인들이 있다. 흔히 글씨체는 글쓴이의 성품을 담는다는데 문인들의 육필 원고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서울국제도서전 부대전시로 8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리는 ‘우리 작가 육필원고전’에서는 윤동주, 천상병, 기형도 등 작고 문인 20인과 더불어 박완서, 조세희, 최인호, 이해인 등 현역 문인 20인의 육필원고를 전시한다.

글을 쓸 때 연필만을 고집하는 김훈, 대학노트와 연습장을 즐겨 쓴 기형도, 자기 이름이 새겨진 전용 원고지를 애용한 박범신 등 다채로운 모습의 육필 원고를 만나본다. 네모반듯한 원고지에 생각의 씨앗을 공들여 심듯 채워 간 ‘손 글씨’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관람료 무료. 문의 02-735-5651.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1979년 소설가 이문열에게 제3회 오늘의 작가상을 안겨준 ‘사람의 아들’(1979)의 첫머리다. 요즘에는 흔히 가로로 쓰는 원고지를 굳이 세로로 쓰고, 하단 부분 여백에 쪽수를 매긴 모습이 눈에 도드라진다. 이 소설로 작가생활의 전환기를 맞이한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의 개정판을 네 번이나 펴낼 만큼 애착을 가졌다.

 

 연필로 글쓰기를 고집하는 김훈

김훈은 글을 쓸 때 키보드 대신 연필을 고집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컴퓨터는 우리 세대를 길러준 문화와 무관해 배우지 않는다”며 “연필로 쓰는 것은 낙후된 것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힘이 들어가고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팔의 느낌으로 알 수 있으니까 신뢰할 만하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연필은 펜처럼 진하게 나오지 않는 까닭에 전각을 새기듯 한 자 한 자 눌러 쓰면서 비로소 ‘글 쓰는 행위’의 무게를 자각하게 된다.

 

 기형도의 ‘포도밭 묘지Ⅱ’

1989년 3월 7일 새벽, 낙원상가 근처의 한 극장에서 싸늘히 식은 몸으로 발견된 요절시인 기형도.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단 한 권만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는 시를 쓸 때 굳이 원고지만 고집하지는 않았다. 남겨진 시와 산문은 대학노트와 연습장, A4용지에서도 발견되었다. ‘포도밭 묘지Ⅱ’ 역시 빛바랜 연습장 위에 깨알같이 촘촘한 글씨로 쓰고, 초록색 색연필로 소박하게 장식했다.

 

 김지하 ‘유목과 은둔’ 머리말

김지하의 아홉 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의 머리말이다. 거침없이 흘려 쓴 글씨가 준마처럼 힘차게 원고지 위를 내달린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저항시인에서 생명사상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변신한 김지하는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수차례 묵란전을 열기도 했다.

 

   신영복의 ‘계수님께’

1968년 7월 이른바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돼 20년 간 무기수로 복역했던 신영복은 ‘어깨동무체’로 불리는 독특한 서체를 남겼다. 1985년 8월 쓴 이 편지는 인간관계를 ‘여름 징역’에 빗댄 너무나 유명한 글이다. ‘검열필’이라는 도장이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한다. 깨알 같은 글씨로 써내려 간 편지 속에 갇힌 자의 조바심보다 세상에서 한발 짝 물러나 바라보는 이의 혜안이 느껴진다. 그의 편지글 원본을 영인한 ‘엽서’가 돌베개 출판사에서 복간돼 시중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

 

   이해인 수녀의 ‘민들레의 영토’

백지 위에 조곤조곤 속삭이듯 써내려 간 이해인 수녀의 ‘민들레의 영토’ 첫 부분이다. 저자 이름이 들어가는 자리에 조그만 낙관을 찍고, 소박하게 멋을 부린 사인을 남겼다.

 

   최인호의 ‘상도’

문인 중에서는 기성품 원고지 외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원고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소설가 최인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인쇄한 전용 원고지를 사용했다. 글씨체도 유독 자유분방하거니와, 한 칸씩 써야 옳은 원고지의 규칙을 종종 무시한 파격이 이채롭다. 칸과 칸 사이에 글자가 걸쳐지기도 하고, 혹은 띄어쓰기를 아예 건너뛴 곳도 종종 눈에 띈다.

 

 박범신의 ‘오래 전 가장 길었던 하루’

소설가 박범신 역시 ‘박범신 원고용지’라는 글자가 한자로 인쇄된 전용 원고지를 사용했다. 붓펜의 느낌을 주는 굵직한 필기도구로 휙휙 써내려 간 활달한 필치는 필자의 성정을 짐작케 한다. ‘썩을년 순임이’라는 노골적인 제목이 조금 부담스러웠던지, 줄을 쭉 긋고 지금의 제목으로 바꿔 놓았다.

 

전영록 -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음악이 너무 생뚱맞다고요,..ㅎㅎ..-s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