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 (88) 이효석과 경성제대 영문과

cassia 2017. 7. 22. 22:33



이효석과 경성제대 영문과


일제강점기에도 '영어'는 지금처럼 힘을 지닌 언어였을까. 경성제국대학 문학부 전공 개설 상황을 보면 그랬던 것 같다. 일제는 1924년 경성제대 예과를 설치하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중심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일제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이었다. 설립 당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경성제국 대학에 개설된 서양문학 전공은 영문학이 유일했다. 일제가 판단하기에도 영미 세계 이해와 영어 습득이 그 정도 중요했던 것이다.

왜 일제는 영미 세계를 이해하고 영어를 습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 것일까.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지금처럼 '영미 세계'가 세계의 중심이고, '영어'가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핵심 열쇠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많은 수재가 영문학과를 선택했지만, 영문학 자체가 외국문학인데다가 제국의 문학이었던 만큼 지식 습득 과정에 많은 장애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경성제대 예과에서 발행한 일본어 잡지 '청량'(淸凉)에 게재한 이효석의 '도둑맞은 아이'(窃まれた兒`1925)는 식민지 영문학도가 직면한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도둑맞은 아이'는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The Stolen Child'를 번역한 작품이다. 이 시는 녹음 우거진 숲과 요정 같은 몽환적 소재를 사용하여 아일랜드의 전통적 세계를 향한 시인 예이츠의 애정을 담아내고 있다.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가 영어로 창작한 시를 일제강점기 조선의 이효석이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로 번역하여 제국대학 잡지에 실은 것이다. 이효석은 이처럼 식민지라고 하는 동일한 정치적 운명을 겪고 있던 아일랜드의 역사와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어와 영어라는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세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 시절의 이효석은 비록 일본어로 글을 쓰기는 했지만 영미 세계 접촉을 통해서 식민지 조선의 운명에 대해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영미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효석이 제국대학 수업을 통해 경험한 영미 세계의 기저에는 근대적 서구 세계에 대한 일본과 일본인의 열광과 찬탄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제국이 부과한 이 선입견에서 식민지 제국대학생이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일제 말기 이효석의 친일전향은 예견된 일이었다. 당시 많은 조선의 엘리트는 '조선문학'과 '조선문화' 같은 조선적 정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구적 근대의 우월성을 먼저 익혀갔다. 식민지 조선 엘리트들이 서구적 근대와의 대면에서 공통으로 겪은 혼란의 연장 선상에서 이효석의 친일전향을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본이야말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적 근대를 이루어낸 나라가 아니었던가.

'우리 것이 최고'라는 국수주의적 태도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 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위치를 확인할 때 '우리' 삶도, 사회도, 정치도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경성제대 재학시절의 이효석
         

  클릭要

 

 

정혜영 대구미래대 산학협력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7.07.22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