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 (89) 주요한 ‘불놀이 ‘와 대동강의 ‘기억‘

cassia 2017. 8. 5. 16:32



주요한 ‘불놀이 ‘와 대동강의 ‘기억‘


1918년 사월 초파일, 평양 대동강 상류지역은 불(火) 천지였다. 일제가 몇 년째 금지해온 초파일 연등행사를 모처럼 그해 허락했기 때문이다. 소원을 담은 수백 개 연등이 밤하늘과 대동강을 낮처럼 밝혔다. 여기에 유람 나온 수십 척 관등선(觀燈船) 불빛까지 더해서 대동강 주변은 하늘도, 땅도, 강물 위도 온통 '불'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축제는 여름이 시작되는 오월 단오까지 이어졌다. 밤이면 대동강 주변 여기저기서 매화포가 터져 하늘을 밝혔다. 낮이면 기생을 태운 놀잇배들이 청류벽, 을밀대, 능라도로 이어지는 대동강 상류지역에서 초여름의 정취를 돋우고 있었다. 사월 초파일부터 오월 단오까지 평양은 매일매일 축제였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대동강이 있었다.

한국 최초 근대시로 알려진 주요한의 '불놀이'는 1918년 사월 초파일 평양 연등행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로 시작되는 이 시의 키워드는 '조선의 전통'이다. 실연으로 삶의 모든 의욕을 상실한 시적 화자를 치유해주는 것은 사월 초파일 대동강을 밝힌 수십, 수백 개의 연등과 관등선의 불빛이다. 그러나 그 불빛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그런 불빛이 아니었다. 그 불빛에는 기생의 놀잇배가 떠있는 사월 초파일의 대동강, 즉 조선의 전통적 세계에 대한 시인 주요한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물론 시에서 묘사되는 기생의 놀잇배 풍경은 '전통'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퇴폐적이다. '정욕(情慾)을 이끄는 불구경' '간단(間斷)없는 장구 소리에 겨운 남자들'이 '불리는 욕심(慾心)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 그리고 '우그러진' 기생의 '치마깃'. 여러 개의 단편적 이미지들이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기생의 놀잇배는 지저분하고도 질펀한 한판 유흥이 벌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기생의 놀잇배가 제아무리 비윤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시인 주요한에게 '4월 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서 시작되는 대동강의 전통적 풍경은 초파일의 연등 불빛과 기생의 놀잇배가 떠있을 때,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었다.

주요한이 '불놀이'에서 그려내는 것은 사월 초파일의 불놀이도 아니고, 대동강 풍경도 아니고, 기생들의 놀잇배도 아니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가 성장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삶의 모든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그 따뜻한 기억이 식민지라는 폭력적 현실 속에서 강압적으로 소거되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전통의 소멸을 목도하는 무력하고도 안타까운 주요한의 심경이 시의 또 다른 한편에 흐르고 있었다.

이 년 전 인터넷 인기 웹툰 사이트에 '여러 대째 내려오는 떡 전통명가 집안'을 다룬 웹툰이 등장해서 잔잔한 호응을 받은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탓에 전통의 기억이 제거된 지 오래인 한국 사회인 만큼, 웹툰의 내용은 당연히 가상현실을 다룬 것이다. 당시 이 웹툰 말미에는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 현실을 아쉬워하는 젊은 누리꾼들의 댓글이 수없이 달렸다. 문재인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한류'의 세계적 전파가 들어 있다. 한국문화의 세계화도 좋지만 전통의 복원, 기억의 재생이 이에 앞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사진 : 경성제대 재학시절의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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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대구미래대 산학협력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7.08.05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