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 (85) 신여성, ‘너희들은 무엇을 어덧느냐’

cassia 2017. 6. 10. 18:07



신여성, ‘너희들은 무엇을 어덧느냐’


1920년 나혜석이 그린 네 컷의 만화가 있다.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이라는 제목을 단 이 만화는 조선의 대표적 신여성 일엽 김원주의 하루 생활을 간략하게 담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김일엽은 낮에는 집안일을 하고 늦은 밤 겨우 집안일이 끝나면 밤 열두 시까지 책을 읽고, 다시 새벽까지 원고를 쓴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여성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1920년 조선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네 컷의 만화에서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1920년대 모든 조선인이 나혜석처럼 김일엽을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 염상섭의 ‘너희들은 무엇을 어덧느냐’(1923)는 또 다른 기억의 한 예이다.

소설은 1920년대 초 삼일운동이 실패한 직후, 암울한 조선 사회를 살아가는 신청년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별한 주인공 없이 다수의 신청년이 등장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덕순’이라는 인물에게 상당 부분 집중되어 있다. 덕순은 여학교 졸업 후, 아버지뻘 되는 재력가와 결혼한다. 그것도 잠시, 덕순은 허영에 들떠서 남편의 돈을 갈취하여 목적도 없이 일본 유학을 떠나고, 일본 유학을 가서는 후배의 애인과 파렴치한 추문을 일으킨다.

덕순이라는 인물은 한마디로 ‘무대책, 무의식, 무개념’의 전형이다. 염상섭은 중편의 긴 분량 속에서 덕순을 문란하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경박한 내면의 소유자로 끊임없이 몰아간다. 소설 속 문제투성이 인물 덕순의 모델이 바로 김일엽, 즉 일엽 김원주이다. 김일엽이라는 한 사람을 나혜석과 염상섭은 이처럼 극명하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염상섭 소설 속 김일엽과 나혜석 네 컷 만화 속 김일엽, 어느 김일엽이 실제 김일엽일까. 답하자면, 두 쪽 모두 김일엽이었다.

1920년 조선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을 겨우 넘고 있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시작 이후 긴 세월을 거치며 일본이 경험했던 그 새로운 시대정신을 조선은 겨우 10여 년 만에 압축해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선 사회 전체가 정신없이 춤추듯 돌아갔고 그 요동치는 현실 속에서 누구도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온 여성의 경우, 새로운 시대와 대면하면서 더 심한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의 감정에 서툴렀고,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는 데 둔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시행착오 속에서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인간’으로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에밀리아 데이비슨이 영국 왕실 경마대회에서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며 달리는 말을 향해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지 벌써 백 년이 지났다. 조선 사회의 보수성 속에서 고투를 거듭하던 김일엽이 수덕사의 여승으로 삶을 마감한 지도 반백 년이 지났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당연한 권리가 된 지 오래이며, 열녀문의 기괴한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삶과 욕망을 가두고 있지도 않다. 새로운 정부가 남자의 전유물이던 장관 자리 삼분의 일을 여성으로 채우겠다고 밝혔다. 역사는 느리지만 바른 방향을 향해 나가고 있는가 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언제나 아름답게 느껴진다.(사진 :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나혜석, '신여자' 4, 192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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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대구미래대 산학협력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7.06.10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