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장석남「목돈」(낭송 장석남)

cassia 2017. 1. 10. 04:34

장석남「목돈」(낭송 장석남)

 

 

 

목돈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 출처 :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사 2005


● 詩, 낭송 – 장석남: 1965년 경기도 덕적에서 태어나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함.


장석남「목돈」을 배달하며


불현듯 목돈 300만원이 생긴다면 나도 장석남 시인처럼 쩔쩔맬 것 같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주머니에 돈을 넣어두고 황홀하게 그저 방황할 것 같습니다. 시인은 근사하게 비유하기 힘들다고 겸손해 하지만,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라는 멋진 비유는 이 시의 꽃이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내야 할 책은 높은 ‘정신’의 산물인데, 계약금 300만원과 그 쓰임새를 궁리하는 것은 ‘빤쓰’처럼 얇고 속된 일이라는 뜻이겠지요. 이런 쩨쩨함에 대해 나무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쩨쩨한데도 쩨쩨하지 않은 척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습니다.

 

문학집배원 안도현. 2008. 3. 10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