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허만하,「이별」(낭송: 도종환)

cassia 2016. 12. 26. 08:38

허만하,「이별」(낭송: 도종환)

 

 


이별

 

허 만 하

 

자작나무 숲을 지나자 사람이 사라진 빈 마을이 나타났다. 강은 이 마을에서 잠시 방향을 잃는다. 강물에 비치는 길손의 물빛 향수. 행방을 잃은 여자의 음영만이 짙어가고


파스테르나크의 가죽 장화가 밟았던 눈길. 그는 언제나 뒷모습의 초상화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에서 무너지는 눈사태의 눈부심. 눈보라가 그치고 모처럼 쏟아지는 햇살마저 하늘의 높이에서 폭포처럼 얼어 있다.


우랄의 산줄기를 바라보는 평원에서 물기에 젖은 관능도 마지막 포옹도 국경도 썰렁한 겨울 풍경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선지피를 흘리는 혁명도 평원을 건너는 늙은 바람도 끝없는 자작나무 숲에 지나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광야에서는 지도도 말을 잃어버린다. 아득한 언저리뿐이다.


평원에서
있다는 것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그는 뒷모습이다.
휘어진 눈길의 끝


엷은 썰매소리 같은 회한의 이력
아득한 숲의 저켠.


풍경을 거절하는
나도
쓸쓸한 지평선이 되어버리는.

 

– 허만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솔, 1999

 

허만하,「이별」을 배달하며

 

눈 쌓인 시베리아의 벌판을 생각합니다. 거기서 이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쏟아지는 햇살도 하늘의 높이에서 폭포처럼 얼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평원에서는 관능도 마지막 포옹도 국경도 겨울 풍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혁명조차도 겨울 풍경에 지워져버립니다. 이런 곳에서는 “있다는 것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런 풍경의 한 가운데에 아득한 언저리가 되어 서 있고 싶습니다.

 

문학집배원 도종환 2007-01-22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