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김탁환, 「김탁환의 원고지」 중에서(낭송 김현우)

cassia 2011. 12. 29. 16:19
    김탁환, 「김탁환의 원고지」 중에서(낭송 김현우) 김탁환, 「김탁환의 원고지」 중에서   5년 남짓 나를 사로잡은 작가는 발자크였다. 밤낮 없이 쓰고 또 쓰는 저돌성도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그의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치는 퇴고의 나날에 매료되었다. 완성된 책 대신에 교정부호가 가득 찬 교정쇄 제본을 벗들에게 선물하는 작가는 발자크뿐이리라.   “나는 이 제본들을 오직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선물합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지만 내 오랜 작업과 내 인내심의 증인들이지요. 이 끔직한 페이지들 위에서 나는 나의 밤들을 보냈습니다.”   나도 발자크처럼 완벽한 작품을 갈망한다. 개악(改惡)의 순간까지, 더 이상 고치면 나빠지는 지점까지 가고 싶다. 그러나 과연 지금까지 내가 지은 소설 중에 그 고지의 6부 능선에라도 닿은 작품이 있을까. 발자크의 작업 방식을 살핀 후 초고를 쓴 기간만큼 퇴고하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일년 썼으면 일년을 고치는 방식. 이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전작 장편을 쓸 수밖에 없었다. 혹시 신문연재의 기회가 온다 해도 초고를 완성한 뒤에야 덤빌 생각이다.   요즈음 나를 사로잡은 작가는 헤르만 헤세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 따라서 『데미안』이나 『크눌프』를 읽었지만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주옥같은 단편 「시인」과 『환상동화집』 그리고 『황야의 이리』를 여름 내내 읽고 나서야, 나는 헤르만 헤세가 결코 청소년용 작가가 아님을 뒤늦게 확신했다. 그의 작품은 적어도 10대에 한 번, 20대에 한 번, 30대에 다시 한 번 읽어야 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노자』를 읽으며 거실을 거니는 그. 흔들의자에 기대어 『요재지이』의 설화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그. 앞마당을 지나 오솔길을 걸으며 『주역』을 암송하는 그. 정신분석이라는 서양의 학문에 동양의 지혜가 합쳐질 때 비로소 『유리알 유희』와 같은 대작이 탄생하는 것이다.   발자크의 끝 모를 퇴고와 헤세의 여유로운 자기 관조. 이 둘을 아우를 수는 없을까. 직선과 곡선의 성질을 모두 가진 또 하나의 선은 없는 것일까. 도전해보고 싶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강하면서도 따뜻한 삶을, 그 문체를. 작가_ 김탁환 - 1968년 경남 진해 출생. 1994년 《상상》 여름호에 「동아시아 소설의 힘」을 발표하며 등단. 장편소설 『허균, 최후의 19일』, 『나, 황진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외 다수의 장편소설과 문학비평집이 있음. 낭독_ 김현우 - 배우. 영화 〈고지전〉, 〈해결사〉 등에 출연. 출전 : 『김탁환의 원고지』← 클릭(황소자리) 김탁환, 「김탁환의 원고지」를 배달하며 몇 주 전에 말씀드렸지만, 오래 전 쓴 제 소설들을 아주 가끔 꺼내 읽어볼 기회가 있지요. 물론 지금보다는 젊었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도 무궁무진하던 때였지만 어찌나 낯선지 정말 내가 쓴 것일까, 의심스러울 때가 많아요. 잘라놓은 손톱이랄까, 벗어놓은 옷이랄까, 생경하기 짝이 없는데요. 글을 쓰는 동안, 경험하셨겠지만, 제 자신을 잊게 되는 순간이 있지요. 제가 의도한 대로 문장이 나오지 않아 쩔쩔 매던 때가 언제인가 싶게 의도하지도 않았던 문장들이 술술 풀리고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지요. 소설이 잘 풀릴 땐 멈추고 글을 쓰지 않는다는, 프랑스 작가의 말도 생각나지 않아요. 글을 쓰는 일이 늘 그것과 같다면 정말 쓸 맛 날 것 같은데요. 그 다음에 찾아오는 건 너무도 싸늘한 이성의 순간이지요. 그 퇴고의 시간이 정말 힘들고 싫었는데 다시 각오를 하게 되네요. 일 년 쓰면 일 년 퇴고를 한다는 김탁환 씨를 따라하지는 못할지라도. 문학집배원 하성란 / 출처 :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