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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음 가득한 삼릉으로 떠나자

cassia 2005. 5. 27. 20:03

솔내음 가득한 삼릉으로 떠나자

 


 

경주 삼릉의 소나무들
    최찬문(dv1214) 기자
남산 끝자락에 있는 봉명암 법일스님을 뵈러 갈 때마다 삼릉을 지나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삼릉 앞 소나무들은 일상에 찌든 나의 두 눈을 한순간에 맑게 해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나무들이 태풍으로 그 자태를 잃어가면서 더 이상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직접 소나무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감을 통해 솔내음을 마음껏 마셔보리라.

▲ 삼릉 주차장 입구 소나무들
ⓒ2005 최찬문

▲ 솔은 우두머리(上)
ⓒ2005 최찬문

▲ 솔은 높음(高)
ⓒ2005 최찬문

▲ 지조와 절개의 소나무 그리고 바위친구
ⓒ2005 최찬문

▲ 단풍나무와 소나무
ⓒ2005 최찬문

▲ 솔은 으뜸(元)
ⓒ2005 최찬문

▲ 솔은 나무 중에서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수리'
ⓒ2005 최찬문

▲ '수리'에서 '술'로 그리고 '솔'
ⓒ2005 최찬문

▲ 솔잎의 푸른빛은 태양이 솟는 동쪽의 기운, 창조와 신생, 생식의 상징
ⓒ2005 최찬문

▲ 소나무 그림자
ⓒ2005 최찬문


삼릉

남산에서는 드문 울창한 송림속에 박씨왕의 능이라 전하는 3기의 능이 있다. 맨앞의 능이 제54대 경명왕릉, 가운데는 제53대 신덕왕릉, 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제8대 아달라왕릉이다.

이 무덤들은 원래 봉분둘레에 큰 호석을 둘러놓은 제29대 태종무열왕릉과 같은 양식이었는데 지금은 다 파괴되어 원형토분처럼 보인다. 그 중 가운데 제53대 신덕왕릉은 1963년 7월에 도굴되어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일훈에 의해 조사보고 된 일이 있어서 신라왕릉과 석실분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구조를 보면 割石(할석)으로 쌓은 석실분으로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남벽중앙에 비교적 긴 이중의 연도가 달렸는데 천정이 재래식 굴뚝처럼 높이 올라간 형식이다. 현실 내에는 연도와 직각되게 넓고 높은 棺臺(관대)를 만들고 그 위에 긴 판석 2매를 놓아 屍床(시상)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북벽과 연접한 동서벽에 연도천정 높이만하게 장방형 구획을 만들고 상하로 나누어 白.黃.朱.靑色(백.황.주.청색)을 칠함으로써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상에서 언급한 신덕왕릉의 구조는 경주시내 노서동에 있는 3기의 석실분과 충효리고분군.서악리석실분 등과 같은 계통을 보이고 있어 이 왕릉이 통일기전후의 고분임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10세기의 신덕왕릉은 될 수 없다. 또 진홍섭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아달라왕과 신덕왕은 서로 700년이란 시간적인 거리가 있어 같은 박씨들의 왕릉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 김원룡은 시대가 내려가도 그들은 故土와 묻힌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강인구 교수는 김씨 또는 석씨계중에서는 이와같은 예를 발견할 수가 없는 점과 서로 가까운 혈족인 왕들은 동일묘역에 2-3기씩 근접하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이러한 경우도 시간적으로 가깝고 연속된 경우이고 삼릉처럼 700년의 장기간의 공백을 넘어 존재하지는 않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 고분들이 제8대 아달라왕 / 제53대신덕왕릉 / 제54대경명왕릉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중에 조선시대 경주부 망성리에 살았던 선비인 화계유의건이 남긴 花溪集(화계집)이란 문집이 있다. 이 문집 안에 "신라왕릉진안설"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朝鮮(조선) 英祖(영조) 6년 庚戌年(경술년)(1730)에 경주부윤으로 있던 金始炯(김시형)이 박씨문중과 타협하여 所傳(소전)을 잃어버린 왕릉을 찻는 작업을 행하였다고 한다.

당시 양 문중은 남산을 기준으로 하여 동남산에 위치하고 있는 능들은 김씨왕의 능으로 하고 서남산일대에 있는 능들은 박씨왕의 능으로 하였다.

이 작업으로 경술년 이후에 등장한 왕릉은 모두 17기로 그 이전의 11기를 포함 28기의 능이 소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정부에서 史蹟(사적)으로 지정한 것들이 영조 당시 나타난 왕릉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정한 것으로 학계의 고고학적 검토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17기의 왕릉들 앞에는 작은 능표석이 서있는데 이것들은 대개 영조 때의 것이다.
자료출처 : www.gyeongju10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