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123) 현진건 '적도'와 불변의 사랑을 향한 열정

cassia 2018. 12. 13. 10:25



(123) 현진건 '적도'와 불변의 사랑을 향한 열정

 

여자는 긴 이별에 앞서, 먼 길 떠나는 남자에게 '백년 낭군'이라는 단어와 남자의 이름을 자신의 팔에 새겨달라고 부탁한다. 둘 만의 사랑의 증표를 몸에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남자 역시 사랑의 자취가 여자에게 남기를 바라고 있던 만큼 여자의 부탁을 받아들여 바늘로 여자의 팔에 문신을 새긴다. 문신을 새겨가던 남자는 애써 고통을 참는 여자의 애처로운 모습에 제 이름자를 채 새기지 못한 채 바늘을 뽑는다. 현진건 '적도'(1934)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이다. 사랑의 영원성을 맹서하기 위해 문신을 새기는 남녀의 모습은 우리 근대문학에서는 참으로 낯선 풍경이다.

남자는 열아홉 살, 여자는 열다섯 살. 불변하는 사랑의 실재를 믿고, 사랑의 열정 때문에 간단없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나이이다. 신산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람도, 사랑도 변해간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나이이기도 하다. 소설이기 때문일까. '적도'에서는 불변하는 사랑에 대한 어린애처럼 순수한 이들의 믿음이 실현된다. 8년의 세월 동안 조선독립을 위해 중국 대륙의 찬바람 속을 떠돌던 남자가 중병의 몸으로 여자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기생 몸으로 숱한 남자를 겪으면서도 오로지 그 남자만을 마음에 담고 있던 여자는 남자가 귀향하자 그와 함께 살아갈 수많은 세월을 꿈꾼다. 반면 남자는 마지막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여자와 함께 지내다가 여자의 품속에서 죽어갈 계획을 세운다. 현진건은 '적도'에서 기생 명화와 독립운동가 김상열, 두 남녀를 통해 혹독한 현실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마모되지 않는 불변의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적도'가 발표된 1934년은 불변의 사랑, 불변하는 신념의 낭만적 열정이 통용될 여지가 없는 때였다. 1931년 일제가 오랜 숙원이던 만주 땅을 침략하면서 식민지 조선 역시 길고 긴 전쟁의 흐름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현실은 삼엄했고, 사람들은 이상과 신념을 포기했다. 이런 시기 현진건의 형 현정건은 신념을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투옥된다. 그리고 긴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하자 곧 병사한다. 현정건이 죽자, 남편의 부재를 견딜 수 없었던 현정건의 아내는 음독자살로서 남편을 향한 사랑을 완성시킨다.(1933) 이 모든 것이 현진건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신념과 불변의 사랑을 향한 현정건 내외의 강렬한 열정, 현진건은 이 열정을 지켜보고 난 후 '적도'(1934)를 발표한다. 그런 점에서 '적도'는 불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형 현정건 내외에게 바치는 헌정소설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년 후,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 중이던 현진건은 서슬 퍼런 일제하에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동아일보에 게재한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 불변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시간과 힘에 마모되지 않는 이런 소수의 정신일지도 모른다.

오른쪽사진 : 1933년 2월 12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현정건의 아내 윤덕경의 유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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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 출처 : 매일신문 2018.12.13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