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124) 최승희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cassia 2018. 12. 27. 14:56



(124) 최승희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1933년 5월 20일 도쿄의 일본청년회관에서 '일본여류무용대회'가 개최되었다. 공연을 관람한 사람 중에는 훗날 소설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있었다. 참가한 수 십 명의 신진 여류 무용수 중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조선인 최승희였다. 이 날 최승희는 모던 댄스 한 편과 조선 춤 '에헤라 노아라'를 공연하였다. 최승희는 스물 세 살이었고 그녀의 춤은 아름다웠으며, 강했다. 최승희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듯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년 후 개최된 최승희의 첫 개인 무용발표회도 관람하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조선의 무희 최승희'(1934)는 이 공연에서 받은 감흥을 적은 글이다.

이 글을 발표 한 시기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미 일본 문단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소설가였다. 그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식민지 조선의 무희 최승희 소개서를 일본 문예잡지에 발표한 것이다. 참으로 열성적인 '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열광적 '팬'心은 글에서도 흘러넘쳤다. 그 마음은 단순한 환호를 넘어 최승희의 예술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 깊은 배려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 한 예가 최승희의 이력을 소개하면서 뜬금없이 오빠 최승일의 친구인 '북만철로호로군 사령부 육군보병 중좌' 이양이라는 사람을 언급하고 나선 것이다. '북만철로호로군'은 만주를 수비하는 일본제국의 군인이었다. 최승희가 일본에서 활약하기 직전, 남편 안막이 조선독립음모사건으로 체포된 바 있었다. 남편의 불온한 이력으로부터 최승희를 보호하기위해서는 일본제국의 신임을 받을만한 인물과의 연결고리가 필요했고 여기에 '북만철로호로군 사령부 육군보병'중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맥이었던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왜 이처럼 최승희에게 열광했던 것일까. 최승희는 언제나 조선적 전통을 담은 춤을 추고 있었다. 서구문화가 쇄도하고 일제가 위압을 가해도 최승희는 조선 춤을 추면서,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굳건하게 지켜갔다. 그것은 서구중심주의로 흘러가던 근대일본이 상당부분 잃어버린 것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신의 뿌리를 지켜낸 자가 지니는 정신의 아름다움과 강함을 최승희에게서 발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서양무용가에게 민족전통의 강력함을 가르쳐주기'를 바란다고 하는, 당시 정치적 현실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당부를 최승희에게 남기며 글을 마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의 무용에서 강함, 즉 힘을 봤다고 하고, 또 다른 일본 문인은 최승희의 무용에서 레지스탕스적 기운을 느꼈다고 한다. 어느 쪽이건 모두 최승희 예술세계가 민족전통에 뿌리를 둔 것을 판단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최근 최승희 기념사업회 추진과 관련해서 최승희의 친일전력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레지스탕스 최승희와 친일파 최승희, 어쩌면 진실은 그 중간쯤에 있지 않을까. 역사에 대한 판단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오른쪽사진 : 무용가 최승희(수림문화재단 소장)
         

☜ 클릭要  

 

 

정혜영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 출처 : 매일신문 2018.12.27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