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이성복「샘가에서」(낭송 : 박정자 )

cassia 2017. 5. 14. 03:14

이성복「샘가에서」(낭송 : 박정자 )

 

 

 

샘가에서

                             이성복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모른 체하십니까 당신은 제게 흐르는 몸을
주시고 당신은 제게 흐르지 않는 중심입니다
저의 흐름이 멎으면 당신의 중심은 흐려지겠지요
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럽혀질 것입니다

 

출처 :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시인선 86)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詩 – 이성복 : 18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977년『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남해 금산』『그 여름의 끝』『호랑가시나무의 기억』『아, 입이 없는 것들』『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송 – 박정자 : 성우. 배우. 영화 <말미잘> <아낌없이 주련다> 등에 출연.

 

이성복「샘가에서」를 배달하며


아주 오래 전 당신과 스치는 순간 저는 흐르기 시작했었지요. 물이 샘에서 흘러나오듯 누군가를 향해 흐르기 시작하는 것, 그 감정의 시작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가속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물줄기를 어긋나게 만들고 그 원천에서 멀어지게 만들어버리지요. 저는 더 이상 당신을 적실 수 없는 곳을 흘러가지만, 이제야 비로소 당신을 흐르지 않는 중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원망도 그리움도 없이 멀리서 빛날 당신을 위해 더 어두워지고 더럽혀지는 일, 그 또한 어찌 사랑이 아니라 말하겠습니까. 샘가에서 시인이 길어올린 한 두레박 아름다운 시를 당신께 보냅니다. 

 

문학집배원 나희덕.2008. 5. 12.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