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오탁번/폭설(暴雪) (낭송 이인철)

cassia 2017. 1. 23. 06:43

오탁번/폭설(暴雪) (낭송 이인철)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출처 : 손님 『손님』, 황금알 2006


詩- 오탁번 :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겨울강』『아침의 예언』『생각나지 않는 꿈』, 소설집『처형의 땅』『저녁연기』등이 있으며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한국시협상 등을 수상함.

 

낭송- 이인철 : 배우. 연극 <아가씨와 건달들> <돈키호테> <갬블러> <킹 데이비드> <미녀와 야수> 등에 출연.

 

오탁번 「폭설(暴雪)」을 배달하며


시중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를 멋지게 한 편의 시로 엮었습니다. 원래 떠돌던 농담에는 폭설이라는 자연현상을 표현하는 해학적인 전라도 사투리가 점층적으로 드러나 있을 뿐입니다. 이 시는 그 이야기에다 새롭게 에로티시즘을 결합했습니다. 그 에로티시즘으로 하여 물기가 감돌고 뼈대가 건강한 시가 탄생했습니다. 오탁번 시인의 시집 『손님』에는 이렇듯 민중적 에로티시즘에 바탕을 둔 시편들이 여럿 들어 있지요. 일독을 권합니다. 그의 시를 읽을 때는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이 자분자분 들려주는 천진하고 유쾌한 말을 따라다니다 보면 저절로 얼굴에 꽃이 핍니다. 영양크림이 따로 없습니다.


 

문학집배원 안도현.2008. 2. 18.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위의 영상이 안 보일 때를 대비하여... youtube 올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