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유희경,「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낭송 오은지)

cassia 2014. 10. 14. 04:07

유희경,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낭송 오은지)
 

 


유희경,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제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 찾아올 곳이 없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밑바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당신을 한 벌의 수저와 묻는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무덤
먼지의 뒤꿈치들, 사각거린다


시_ 유희경 - 유희경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고,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가 있다.

낭송_ 오은지 - 배우. 연극 '색다른 이야기 읽기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등에 출연.
출전_ 오늘 아침 단어 『오늘 아침 단어』(문학과지성사)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유희경,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를 배달하며

 

처음 이 시를 읽은 것은 신춘문예 당선시를 발표하는 신문지상이었는데요. 참신한 감각이 얼른 눈에 들어오더군요. 다시 읽어 보니 시의 이면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지네요.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이라고 했으니, 늦가을이거나 초겨울일까요?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의 뒷모습,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삼촌, 그리고 여기에 없는 당신. 당신은 아버지일까요? “춥지 않은 무덤”이라는 시구로 유추하자면, 아버지는 돌아가셨을까요? 식탁에 고지서 몇 장이 놓여 있고, 욕실의 하얀 타일은 오래 되면 누르칙칙하게 변색되지요. 그게 누추한 일상의 모습이지요. “티셔츠에 목을 넣”는 청년은 그 일상 속에서 한 사람의 부재가 만든 공허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지요. 어딘가에서 울려오는 슬픔의 맥동(脈動)에 마음이 축축하게 젖습니다.

 

문학집배원 장석주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 바람과 별이 쉬어가는 뜨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