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박연준, 「우산」(낭송 원인진)

cassia 2014. 9. 10. 03:25

박연준, 「우산」(낭송 원인진)
 

 


박연준, 「우산」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시_ 박연준
박연준(1980~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에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하며 등단했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등이 있다.

낭송_ 원인진 - 배우. 연극 '날자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달무리' 등에 출연.
출전_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창비)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송승리
프로듀서_ 김태형

 


박연준, 「우산」을 배달하며

 

장마가 끝났으니, 우산들은 잡동사니들을 두는 창고 같은 데 처박고, 사람들은 금세 우산 따위는 잊고 말겠지요. 우산이 동그랗게 만 척추들을 펴고, 주름을 펼 수가 있는 것은 비올 때만 가능한 일이예요. 비오지 않는 철에 우산은 벽에 매달리거나 구석에서 수많은 비의 혀들과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하며 기다려야 해요. 20대 조카아이가 직장을 그만두고 새 일을 구하고 있는데, 실직의 벽은 드높아서 그의 처지가 비 오지 않는 계절 벽에 매달려 있는 우산이나 마찬가지예요. 딱한 노릇이지요. 이 사회에서 실직자란 용도폐기된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잉여에 지나지 않아요. 제 철의 쓰임을 위해 벽에 매달린 우산처럼 기다림의 하염없음 속에서 존재의 공회전을 하는 자들은 고통스럽지요.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고 하네요. 왜냐면요, 기다림이 우산을 낡고 못 쓰게 만들 테니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외진 곳에서 헐벗은 채 기다림이란 형벌을 앓고 있는 걸까요?

 

문학집배원 장석주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 바람과 별이 쉬어가는 뜨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