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전동균, 「내가 장미라고 불렀던 것은」(낭송 이준혁)

cassia 2014. 9. 15. 22:09

전동균, 「내가 장미라고 불렀던 것은」(낭송 이준혁)
 

 


전동균, 「내가 장미라고 불렀던 것은」


내가 장미라고 불렀던 것은 하이에나의 울부짖음이었다
내가 나뭇잎이라고 불렀던 것은 외눈박이 천사의 발이었다
내가 비라고 불렀던 것은 가을 산을 달리는 멧돼지떼, 상처를 꿰매는 바늘
수심 이천 미터의 장님 물고기였다 내가 사랑이라고, 시라고 불렀던 것은
항아리에 담긴 바람, 혹은 지저귀는 뼈
내가 집이라고 불렀던 것은 텅 비었거나 취객들 붐비는 막차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물으며
내가 나라고 불렀던 것은
뭉개진 진흙, 달과 화성과 수성이 일렬로 뜬 밤이었다 은하를 품은 먼지였다 잠자기 전에 빙빙 제자리를 도는 미친 개였다


시_ 전동균
전동균(1962~ )은 경주에서 태어났다.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하며 등단했다.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등이 있다.

낭송_ 이준혁 - 배우. 연극 '날자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달무리' 등에 출연.
출전_ 우리처럼 낯선 『우리처럼 낯선』(창비)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박지영
프로듀서_ 김태형

 

전동균, 「내가 장미라고 불렀던 것은」을 배달하며

 

사물과 그것을 지시하는 이름 사이에는 심연 같은 게 놓여 있지요. 이름들 속에서 사물의 근원적 기원을 찾는 일은 아득한 일이지요. 이름은 실재가 없는 실재요, 사건이 없는 실존-사건이니까요. 이름은 실재나 그것을 가로지르는 본성과는 무관한 관념, 속이 텅 빈 것일 뿐. 그렇지 않다면 ‘장미’와 ‘하이에나의 울부짖음’ 사이, ‘나뭇잎’과 ‘외눈박이 천사의 발’ 사이의 간극을 납득하기는 어렵지요. ‘비’를 ‘산을 달리는 멧돼지 떼‘라고 말할 때 두 이미지의 소리값이 겹쳐지며 감각적인 전이(轉移)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나지요. 하지만 ‘나’란 ‘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름은 운명이고,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 운명에 갇힙니다. 시인은 ‘이름’에 앞서는 본성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합니다. 스스로 ‘나’라고 불렀던 것은 ‘뭉개진 진흙’ ‘달과 화성과 수성이 일렬로 뜬 밤’ ‘은하를 품은 먼지’ ‘미친 개’라고 하는데요. 왜? 라고 반문할 수는 없습니다. ‘이름’들이란 실재와는 무관하게 그것을 명명하는 능력과 상상력 사이의 등가(等價)를 이루기 때문이지요.

 

문학집배원 장석주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 바람과 별이 쉬어가는 뜨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