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복효근詩

cassia 2012. 3. 9. 10:23

 

 


 

목련꽃 브라자 / 복효근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

 


고 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시집 <목련꽃 브라자> 2005년 천년의시작

 


조선호박 / 복효근

 

잘 익은 조선호박은

자식 둘 기르며 허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몸매

내 작은 형수 엉덩이 같아서

신난간난 한세월 지긋이 뭉개온 토종의 저 둥근 표정이라니

그속엔

천둥 같은 가뭄 같은  것들도 푹 삭아서 약으로 고였겠다

이제는 따글따글 오뉴월 뙤약볕이 한 말은 여물어서

은빛 붕어새끼 같은 눈물 같은 씨앗들이

어둠 속 환하도록 빛나겠다

얼마나 깊은 궁륭일까

잘 익은 조선호박일 수록 큰 허공 하나 키워서

내 형수 엉덩이 두드려 볼 수는 없어도

누렁호박 두드려보면 들린다

뿌리야 거름구덩이 속에 박혔어도

지리산 줄기처럼 섬진강 줄기처럼 넌출넌출

벋어나간 호박덩굴 궁 궁 발울림 소리들

봄 햇살 함께 일어서선

늦서리 함뿍 뒤집어쓰고야 밭언덕을 내려와

죽은 시아비도 늙은 시어미도 바람같은 지아비도

저녁 한 밥상에 둘러앉히고

궁시렁 구시렁 쌀 안치는 소리

상차리는 소리 ‥‥‥

 

명편 / 복효근


서해 바닷가 채석강 암벽 한 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채석강 암벽이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옳다 누군가 눈이 참 밝구나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사내의 등을 기댄 그니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 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그리고 그것을 새길만한 가치가 있다면
사랑했다는 것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지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쟁반탑/복효근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에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틈, 사이/복효근

 

 

잘 빚어진 찻잔을 들여다본다
수없이 실금이 가 있다
마르면서 굳어지면서 스스로 제 살을 조금씩 벌려
그 사이에 뜨거운 불김을 불어넣었으리라
얽히고설킨 그 틈 사이에 바람이 드나들고
비로소 찻잔은 그 숨결로 살아 있어
그 틈, 사이들이 실뿌리처럼 찻잔의 형상을 붙잡고 있는 게다
틈 사이가 고울수록 깨어져도 찻잔은 날을 세우지 않는다
생겨나면서 미리 제 몸에 새겨놓은 돌아갈 길,
그 보이지 않는 작은 틈, 사이가
찻물을 새지 않게 한단다
잘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 벽도
양생되면서 제 몸에 수 없는 실핏줄을 긋는다
그 미세한 틈, 사이가
차가운 눈바람과 비를 막아준다고 한다
진동과 충격을 견디는 힘이 거기서 나온단다
끊임없이 서로의 중심에 다가서지만
벌어진 틈, 사이 때문에 가슴 태우던 그대와 나
그 틈, 사이까지가 하나였음을 알겠구나
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 노여움의 불길과 내 슬픔의 눈물이 스며들 수 있게
서로의 속살에 실뿌리 깊숙이 내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새에 대한 반성문 /  복효근

 

 

춥고 쓸쓸함이 몽당빗자루 같은 날
운암댐 소롯길에 서서
날개소리 가득히 내리는 청둥오리떼 본다
혼자 보기는 아슴찬히 미안하여
그리운 그리운 이 그리며 본다
우리가 춥다고 버리고 싶은 세상에
내가 침뱉고 오줌 내갈긴
그것도 살얼음 깔려드는 수면 위에
머언 먼 순은의 눈나라에서나 배웠음직한 몸짓이랑
카랑카랑 별빛 속에서 익혔음직한 목소리들을 풀어놓는
별, 별, 새, 새, 들, 을, 본다
물 속에 살며 물에 젖지 않는
얼음과 더불어 살며 얼지 않는 저 어린 날개들이
건너왔을 바다와 눈보라를 생각하며
비상을 위해 뼈 속까지 비워둔 고행과
한 점 기름기마저 깃털로 바꾼 새들의 가난을 생각하는데
물가의 진창에도 푹푹 빠지는
아, 나는 얼마나 무거운 것이냐
내 관절통은 또 얼마나 호사스러운 것이냐
그리운 이여,
네 가슴에 못 박혀 삭고 싶은 속된 내 그리움은 또 얼마나 얕은 것이냐
새 한 무리는 또
초승달에 결승문자 몇 개 그리며 가뭇없는
더 먼 길떠난다 이 밤사
나는 옷을 더 벗어야겠구나
저 운암의 겨울새들의 행로를 보아버린 죄로
이 밤으로 돌아가
더 추워야겠다 나는
더 가난해져야겠다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핀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시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2006년 문학의전당

 

건전지 / 복효근 

 


 건전지는 극과 극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물려있다 애愛와 증憎 삶과 죽음의 자웅동체이다 어느 것 하나로는 심장은 뛰지 않는다 내 사랑도 죽이고 싶을 만큼의 똑같은 전압이 아니었다면 너와 나와의 온몸에 저릿저릿 피를 흐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몸에 꼭 맞는 관 속에 누워 죽어가면서 극과 극에서 불러내는 저 불꽃

 

 

숫돌 / 복효근

 

숫돌을 생각한다
돌에게도 수컷이 있을까
그래, 수컷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자면
숫돌에 무딘 칼을 문질러보라
무딘 쇠붙이를 벼리는 데는 숫돌만한 것이 없으리
닳아서 누워버린 날을 세우려면
숫돌은 먼저 쇠에 제 몸을 맡기고
제 몸도 함께 닳아야 하는 것인데
명필이
먹에 닳아서 뚫린 벼루의 숫자로 제 생애를 헤아리듯이
숫돌은
제가 벼린 칼날이 몇인가, 혹은 그 날이 무엇을 베었는가
근심하며 고뇌하며
닳아서 야윈 뼈에 제 생애를 새기느니
통장의 잔고를 헤아리다가
허접한 가계에 주눅 든 내 남성이 한없이 짜부러지는 때
생각한다
수컷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외줄 위에서 /복효근

 

허공이다
밤에서 밤으로 이어진 외줄 위에 내가 있다
두 겹 세 겹 탈바가지를 둘러쓰고
새처럼 두 팔을 벌려보지만
함부로 비상을 꿈꾸지 않는다
이 외줄 위에선
비상은 추락과 다르지 않다
휘청이며 짚어가는 세상
늘 균형이 문제였다
사랑하기보다 돌아서기가 더 어려웠다
돌아선다는 것,
내가 네게서, 내가 내게서 돌아설 때
아니다, 돌아선 다음이 더 어려웠다
돌아선 다음은 뒤돌아보지 말기 그리움이 늘 나를 실족케 했거늘
그렇다고 너무 멀리 보아서도 안되리라
줄 밖은 허공이니 의지할 것도 줄밖엔 없다
외줄 위에선 희망도 때론 독이 된다
오늘도 나는
아슬한 대목마다 노랫가락을 뽑으며
부채를 펼쳐들지만 그것은 위장을 위한 소품이다
추락할 듯한 몸짓도 보이기에는 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외길에서는
무엇보다 해찰이 가장 무서워서
나는 나의 객관 혹은 관객이어야 한다

 

 

 

산길 / 복효근 

 

산정에서 보면

더 너른 세상이 보일 거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산이 보여주는 것은 산

산너머엔 또 산이 있다는 것이다

절정을 넘어서면

다시 넘어야 할 저 연봉들 ??????

 


함부로 희망을 들먹이지 마라

허덕이며 넘어야 할

산이 있어

살아야 할 까닭이 우리에겐 있다

 

콩나물에 대한 예의 /복효근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대숲에서 뉘우치다/복효근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보라

둘째딸 인혜는 그 소리를 대나무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라 했다
언젠가 청진기를 대고 들었더니 정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우긴다

나는 저 위 댓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가
대나무 텅 빈 속을 울려 물소리처럼 들리는 거라고 설명했다
그 뒤로 아이는 대나무에 귀를 대지 않는다

내가 대숲에 흐르는 수천 개의 작은 강물들을
아이에게서 빼앗아버렸다

 

저 지하 깊은 곳에서 하늘 푸른 곳으로 다시
아이의 작은 실핏줄에까지 이어져 흐르는
세상에 다시없는 가장 길고 맑은 실개천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고 들어보라

그 푸른 물소리에 귀를 씻고 입을 헹구고
푸른 댓가지가 후려치는 회초리도 몇 대 아프게 맞으며

 

잠자리에 대한 단상 /복효근

 

 

잠자리 두 마리가 엉킨 채로 날고 있다

그러니까 저것들은 시방 홀레붙은 채로 비행을 하는 것이렷다

방중술의 체위로 이름하자면 비행체위쯤 될 터인데

참 둔하다

저리 둔한 순간에는 천적에게 잡히기도 쉬울 터인데

참 아둔하다

가만히 머문 자리에서 사랑을 나누지 않고

그 짓을 하며 날아야 할 만큼 조급한 일이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혼자서 날아온 먼 길과 다시 혼자서 가야 할 먼 길 사이

단 한번뿐인 이 시간

혼자서 날 때와 둘의 날개로 날 때

그 삶과 사랑의 무게 차이를 가늠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네 날개 힘들여 함께 균형 잡아 파닥이며

한 방향과 한 목적지를 향하여 날아가는 그것이,

참 둔하고 아둔한 그것이 삶과 사랑 아니겠느냐고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싸움하는 자세와 똑 같은 체위로 사랑을 하고

그 순간에도 서로 다른 세계를 그리는 이 음습하고 낮은 세상에다 대고

저 한 쌍은

목숨을 거는 것이 잠자리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 복효근

 

눈이 뿌리기 시작하자
나는 콩나물국밥집에서 혼자 앉아
국밥을 먹는다 입을 데는 줄도 모르고
시들어버린 악보 같은 노란 콩나물 건더기를 밀어넣으며
이제 아무도 그립지도 않을 나인데
낼모레면 내 나이가 사십이고
밖엔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돈을 빌려달라는 놈이라도 만났으면 싶기도 해서
다만 나는 콩나물이 덜 익어 비릿하다고 투정할 뿐인데
자꾸 눈이 내리고
탕진해버린 시간들을 보상하라고
먼 데서 오는 빚쟁이처럼
가슴 후비며 어쩌자고 눈은 내리고
국밥 한 그릇이 희망일 수 있었던,
술이 깨고 술 속이 풀려야 할 이유가 있던
그 아픈 푸른 시간들이 다시 오는 것이냐
눈송이 몇 개가 불을 지펴놓는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
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
심장은 뛸 수 있을까 사십에
그까짓 눈에 속아
입천장을 데어가며 시든 콩나물 악보를 밀어넣는다

 

 

 

 덩굴손 / 복효근

 

 

  베란다에서 웃자라
  쓰러질 듯 껑충 키가 큰 땅나리를
  작두콩 덩굴에 가만 기대어주었더니
  아, 글쎄 땅나리 그것이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은
  작두콩 덩굴을 한 바뀌 돌아
  휘어감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모른 체
  받아주고 있는 작두콩의 천연덕스러움도 그렇지만
  어디를 찾아봐도
  덩굴성이라고 밝혀지지 않은 땅나리가
  기대는 것으로 모자라
  덩굴손처럼 상대를 휘감다니......
  어젯밤 지하철에서
  피곤한지 잠들어 내 어깨를 기대오던,
  급기야는 무심코 내 어깨를 감던
  취중의 그 초로를 생각하면
  어디를 봐도 덩굴성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어도
  우리 저마다의 그 어딘가에
  덩굴손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제 안 깊숙히 들여다보라
  지금 누군가에 가만 기대고 싶은,
  허리를 살며시 감고 싶은
  덩굴손 하나가 마음 허공을
  휘청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지

 

마늘촛불/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가운데에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내 비유법이 좀 과하다 싶기도 하지만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삼겹살 함께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안개꽃/복효근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함박꽃 그늘 아래서 / 복효근

 

어느 아득한 눈나라 북녘에서 왔을까
백두대간 지리산 능선에는
하 눈부셔서
눈감아야 오롯하게 보이는 꽃 있어

함박꽃,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는 그 꽃
지그시 눈감고 들여다보면
불타는 꽃심장 속
한번도 내어준 적 없는 마음의 빛깔이랑
그 꽃가슴 둘러싼 시원(始原)의 하늘빛도 비쳐와

여염집 키 큰 목련만 보아도 가슴 뛰는데
가시덩굴 바위틈
함박꽃, 그 꽃덩이 보면
나는 그만 숫총각이 되고 만다네

열아홉 숫총각이 되어
봉화산 영취산 속리산 태백산 금강산 넘어 넘어서 가면
이제껏 지도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어느 눈부신 나라
이 세상 맨 처음의 처녀 같은 함박꽃
그 꽃그늘 아래
한 천 년쯤 쉬어가고 싶네

 

 

 

음악 / 복효근

 

신의 악보는
딱히 오선은 아니어서
더더구나 직선만은 아니어서
저 넌출넌출 산 능선과
그 사이로 굽이굽이 사라져
보이지도 않은 강줄기가 그것이리라
세상의 모든 길과
사람 사는 동네로 휘어드는
몇 가닥 전선줄도 악보 아니랴
무리 져 날아오르는 새는 그의 음표일러니
또 새들만이랴
그 아래 식솔들 데리고 땅을 일구는 사람만큼
또 높은 음표 어디 있으랴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올망졸망 능선의 무덤들
숲 속 벌레 한 마리까지 음표였구나
저 천리 밖 숲가에
나무 가지 하나만 부러져도
이 음악은 화음이 틀어지기도 해서
삶과 죽음의 자세가 우주보다 어렵다
신마저도 지울 수 없는 이 엄연
그러니
보이는 것만이 음악이랴
고요만큼 장엄한 연주가 다시없느니
어찌
들리는 것만이 음악이랴

 

냉이의 뿌리는 하얗다/ 복효근

 

 

깊게깊게 뿌리내려서 겨울난 냉이
그 푸릇한 새싹, 하얗고 긴 뿌리까지를
된장 받쳐 뜨물에 끓여놓으면
객지 나간 겨울 입맛이 돌아오곤 하였지

위로 일곱 먹고 난 빈 젖만 빨고 커서
쟈가 저리 부실하다고 그게 늘 걸린다고
먼 산에 눈도 덜 녹았는데
막내 좋아한다고 댓바람에 끓여온 냉잇국

그 푸른 이파리 사이
가늘고 기다란 흰머리 한 올 눈에 띄어
눈치채실라 얼른 건져 감춰놓는데
그러신다 냉이는 잔뿌리까지 먹는 거여
......

대충 먹는 냉잇국 하얀 김이 어룽대는데
세상 입맛 살맛 다 달아난 어느 겨울 끝
두고두고 나를 푸르고 아프게 깨울 것이다
차마 먹지 못한 당신의 그 실뿌리 하나

 

 

 

고구마의 경전 / 복효근

 

겨울을 넘긴 고구마는
툭툭 힘줄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새 봄의 기미를 알아채고는
제 몸에 혈관을 트는 것이다
물길을 트는 것이다
물그릇에 잠가두면
뿌리가 내리고 검푸른 줄기가 잎과 함께 돋는데
고구마 순이 자라는 만큼
그 혈관과 물길로
새싹에 줄기에 젖줄을 대는 것이다
넌출이 무성하게 뻗은 어느날
정작 고구마 덩이는 그 안이 텅 비게 된다
기꺼이 그것 때문에 몸 바칠 수 있다면
그 푸른 잎들을 고구마의 경전이라고 해야 옳다
껍질만 쭈글쭈글 내려앉은 그것을 이제
더 이상 고구마라 부르지 않는다 
어느 새 앞 장의 경전이 뒷장에게
그 잎이 또 그 뒷장에게
그리하여 긴 탯줄을 이루어
고구마를
한 계절 너머의 어느 세상에 전해주었던 것이다

 

 

 

버팀목에 대하여 / 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바람이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틔우고 꽃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단풍 - 복효근

 

 

저 길도 없는 숲으로
남녀 여남 들어간 뒤
산은 뜨거워 못 견디겠는 것이다

골짜기 물에 실려
불꽃은 떠내려오고
불티는 날리고

안 봐도 안다
불 붙은 것이다
산은,

 

 

물의 노래 / 복효근

 

먼 길 돌아가네

두 주먹 불끈 눈두덩 찍어내며

먼 길 돌아가네

어느 길 잃고 미친 사랑이

질러놓은 불길

그 불길도 다 타서

밤길 더듬어 돌아가네

 

하류로 하류로 흘러가서

아무도 다치지 않을

꽃 한 송이 피워낼 생각

썩은 내 몸에서

빚어올리는 물빛 향기

그렇게 잠시

물 위에 머물다가 다시

물이 되어 흐를 생각으로

나 먼 길 돌아가네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복효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복효근


한 걸인이 다가와

내 발에 손을 얹었다가 다시 제 이마에 가져다가 댔지

경배의 뜻이라고 하네

실은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누더기 옷에 덕지덕지 땟물이 흐르는 불가촉천민이라네

그러나 그대여 알고 보면 이 나라에선 외국인인 나도

사성에 들지 못하는 똑 같은 불가촉천민이라네

그런데 경배라니

나는 외면했네

내 지폐는 너무 고액권이었고

몰려들기 시작한 그대들은 너무 많았으므로

외면한 내 눈엔 희고 눈부신 힌두사원이 눈에 들어왔고

그 풍경이 스치며 가슴에 깊은 칼금을 그었네

어떻게 왔는가는 말할 수 있지

비행기 타고 왔고 그 이전에 어머니 탯줄을 타고 왔지

하지만 왜 왔는가는 알 수 없었지

언젠가 다시 와야 한다면

그땐 한 마디 더듬거리며 말할 수 있겠네

나 그대를 외면하여 복 짓지 않았고

그대 나 같은 불가촉천민에게 경배로 복 지었으니

다시 어느 세상에서 만나거든

이제 내가 그대 발에 입 맞추겠노라고,

그대, 싯타르타일지도 모를

 

 

 수선화에게 묻다 /복효근   

 

말라비틀어진 수선화 알뿌리를 다듬어
다시 묻고 나니
비 내리고 어김없이 촉을 틔운다


한 생의 매듭 뒤에도 또 시작은 있다는 것인지
어떻게 잎사귀 몇 개로
저 계절을 건너겠다는 것인지
이 무모한 여행 다음에
기어이 다다를 그 어디 마련이나 있는지


귀기울이면
알뿌리, 겹겹 상처가
서로를 끌어안는 소리
다시 실뿌리 내려 먼 강물을 끌어오는 소리
어머니 자궁 속에서 듣던
그 모음 같은 것 자음 같은 것


살아야 함에 이유를 찾는 것은 사치라는 듯
말없이 꽃몽오리는 맺히고
무에 그리 목마르게 그리운 것 있어
또 한 세상 도모하며
잎은 잎대로 꽃대궁은 또 꽃대궁대로 일어서는데


이제 피어날 수선화는
뿌리가 입은 상처의 총화라면
오늘 안간힘으로 일어서는 내 생이,
내생에 피울 꽃이
수선화처럼은 아름다워야 되지 않겠는가


꽃,
다음 생을 엿듣기 위한 귀는 아닐까

 

 

 

 

함박꽃 그늘 아래서 / 복효근

 

어느 아득한 눈나라 북녘에서 왔을까
백두대간 지리산 능선에는
하 눈부셔서
눈감아야 오롯하게 보이는 꽃 있어

함박꽃,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는 그 꽃
지그시 눈감고 들여다보면
불타는 꽃심장 속
한번도 내어준 적 없는 마음의 빛깔이랑
그 꽃가슴 둘러싼 시원(始原)의 하늘빛도 비쳐와

여염집 키 큰 목련만 보아도 가슴 뛰는데
가시덩굴 바위틈
함박꽃, 그 꽃덩이 보면
나는 그만 숫총각이 되고 만다네

열아홉 숫총각이 되어
봉화산 영취산 속리산 태백산 금강산 넘어 넘어서 가면
이제껏 지도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어느 눈부신 나라
이 세상 맨 처음의 처녀 같은 함박꽃
그 꽃그늘 아래
한 천 년쯤 쉬어가고 싶네

 

 

 

 뜨지 않는 별/복효근

       

             별이라 해서 다 뜨는 것은 아니리.

             뜨는 것이 다 별이 아니듯

             오히려

             어둠 저 편에서

             제 궤도를 지키며

             안개꽃처럼 배경으로만 글썽이고 있는

             뭇 별들이 있어,

 

             어둠이 잠시 별 몇 개 띄워 제 외로움을 반짝이게 할 뿐

             가장 아름다운 별은

             높고

             쓸쓸하게

             죄짓듯 사랑 앓는 가슴에 있어

             그 가슴 씻어내는

             드맑은 눈물 속에 있어,


             오늘 밤도

             뜨지 않는 별은 있으리.

 

 

 

콩밥을 먹으며 / 복효근

 


밥에 놓아 먹으려 하루 한 나절 불려놓은 검정콩이
그렇게 또록또록 눈을 뜰 줄이야
성급하게 도도록하게 뿌리를 내밀 줄이야

 

마악 지은 밥에 박힌 검정콩은 뿌리가 한결 더 돋은 것도 같은데
그랬을 것이다 더 뜨겁고 더 깊은 데로 뿌리를 뻗느라
압력솥 속에서도 제 몸을 옴작인 흔적

 

그것들은 내 뱃속에 들어가서도 눈을 더 크게 뜨고
내 안의 더 깊고 뜨거운 데를 찾아
자꾸만 뿌리를 내릴 것인데
나는 콩을, 그 잎을 그 꽃과 꼬투리를 콩포기를 먹은 셈이므로

 

아무렇게나 숟가락을 붙들고 배가 부르고 그저
하루의 보람이 콩말만큼이나 졸아들 때면
내 안의 수많은 눈들이 새록새록이 눈을 뜨고
수많은 콩포기가 가만가만 나를 흔들어주었으면도 싶다

 

내 안에도 무슨 뿌리 같은 것이 내려서
깊어지며 뉘우치며 문득문득 뜨거워지고만 싶은 것이다

 

 

시집 <목련꽃 브라자> 2005년 천년의시작

 

 

 

여시아문 /복효근

 


인도 뭄바이 새벽 세 시

가로수 잎사귀가 낯설고 신기로워

늘어진 가지를 붙잡고 가만 만져보는데

그가 말했다

인도에선 밤에 나무를 손대지 않는다고,

왜냐고 내가 묻자 영어에 서툰 나를 위하여

영국식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나무가 잠을 자잖아요.

 

 어떤 제다법製茶法 / 복효근


전주에 가면 茶門이라는 찻집이 있어
그 쥔장은 야생차를 고집하는데
그 냥반 따라 순창 회문산 야생차를 따러 갔다
여린 찻잎 다시 말하면 차의 잎
차의 입, 차의 입술
햇살과 바람과 이슬을 마시는 차나무의 입을
그 야들야들한 갓난 아이의 입술 같은 찻잎을
잔인하게 또옥똑 따는 것을 보고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어린 잎순들을 달구어진 가마솥에 넣고 덖어서
꺼내어 덕석 위에 쏟아놓고
손으로 부벼서 찻잎에 상처를 낸다
찻물이 잘 우려나오게 하기 위함이리라
그러기를 아홉 번이라
아아 잔인하고 모진 제다법이여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완성된 차를 시음해보시라
갓 만든 차를 다관에 담고 물을 붓자
영영 죽어버린 줄 알았던 찻입들이
잘 익은 물 속에
제가 마신 회문산의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다 풀어내 놓는데
아홉 번의 가마솥 모진 연단을 연록색 향기로 빚어내 놓는데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애초 나무에 매달렸던 그 형상으로 돌아가
물고기처럼 다관 속에 노니는데......
그 차를 마시고도
그 찻잎의 흉내를 한 자락이라도 내지 못할 량이면
이승에서건 저승에서건
다시는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겨울 숲 / 복효근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을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복효근 詩選 <어느 대나무의 고백> 문학의전당. 2006

 

 

어떤 참선 / 복효근


단풍나무 아래
죽은 말벌 몸뚱이에 기다랗게 무엇이 자라고 있다
동충하초,
겨울에는 벌레였던 것이
여름에는 풀이라는 뜻이란다
벌레라는 이름으로
날카로운 침 속에 독을 감추고
늘 치욕 쪽으로만 기울던
추웠던 한 생이 끝나서
몸을 벗어나보나 했더니
그 몸이 무엇인가의 씨앗이었거나
그 씨앗에 탯줄을 대는 자궁이었구나
생은 그렇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서
한겨울 끝나자
또 여름이 기다리고 있어
그 무엇의 후생으로 다시 한 생을 건너야 한다면
또 다시 그 무엇인가의 내 생일지도 모르는
저 풀은 시방
염천의 태양 아래서
전생의 독을 약으로 바꾸고 있겠다
동충하초 하나 깊은 참선에 들었다

 

 

고목 / 복효근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 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하나 가꾸고 싶다

 

 

어머니에 대한 고백복효근

 

때 절은 몸뻬 바지가 부끄러워
아줌마라고 부를 뻔했던 그 어머니가
뼈 속 절절히 아름다웠다고 느낀 것은
내가 내 딸에게
아저씨라고 불리워지지는 않을까 두려워질 무렵이었다.

 

 


자비 / 복효근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꽃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를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받쳐주네

 

변산바람꽃/복효근

 

10할이 바람이었다

풀잎 하나의 속내까지가 궁금하여
저 구름 한 자락의 일에도 참견을 하며
도무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날들
들쑤시는 이 화냥끼!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없는 이력과 흔적들
요약하면 한 줄도 안 되는 생애를 약탕기에 안쳐놓고
이 겨울 가기도 전에 봄을 앓는다

이제는 전화번호부도 찢어버리고
주소록도 없애버리고
가능만 하다면 나조차 호적에서 싹 지워버리고
한 사흘 머물러 그 무엇이 될 수 있다면
내변산 어느 골짜기 저 꽃의 형상으로나 나토고 싶다

입구가 출구였다는 것을
어슴푸레 알 것도 같은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감감 철없이 떠도는 마흔 세 살

 

 

자벌레/복효근

 

오체투지, 일보일배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일러니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숙제와 폐타이어/복효근

 

 

숙제장 노트를 엎어놓은 듯한 슬레이트 지붕위에

폐타이어 몇 개 놓여있다

그렇지 삶은 숙제이지

저 작은 지붕 아래도 풀어야 할 문제는 잔뜩 쌓여서

때로는 새벽까지 불이 밝았다

그래서 지아비가 다시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나가고

지어미는 그보다 먼저 까만 비닐봉지에

두부를 사들고 들어가 찌개를 끓였을 것이다

그래 잘 풀었다고 선생님이

착한 아이 숙제장에 그려준 동그라미처럼

하느님이 동그라미 대신 폐타이어를 올려놓았을지도 모르지

가끔은 냄비가 뒹굴고

흐느낌 소리가 마당귀를 적셨으나

요란하게 풀 문제도 있긴 하는 거라

숙제를 잘 풀긴 하였던지

이번 태풍에도

지붕 끄떡없다 폐타이어 몇 개

저 수레 같은 집 한 채 끌고

이 밤도 어느 하늘 향하여 가려는지

창에 다시 환하게 불이 켜지고

거기에 응답하는

누구의 미소인가 하늘엔 눈썹달

 

<문학수첩07봄>

 

강은 말랐을 때 비로소 깊어진다 / 복효근 

 

가뭄이 계속 되고   
뛰놀던 물고기와 물새가 떠나버리자    
강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처음으로 자신의 바닥을 보았다     

한때
넘실대던 홍수의 물높이가 저의 깊이인줄 알았으나
그 물고기와 물새를 제가 기르는 줄 알았으나
그들의 춤과 노래가 저의 깊이를 지켜왔었구나
강은 자갈밭을 울며 간다    

기슭 어딘가에 물새알 하나 남아 있을지
바위틈 마르지 않은 수초 사이에 치어
몇 마리는 남아 있을지......
야윈 몸을 뒤틀어 가슴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강은
제 깊이가 파고 들어간 바닥의 아래쪽에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가문 강에  
물길 하나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연어의 나이테 / 복효근

 

잘라놓은 연어의 살 속엔
나이테 무늬가 있다
연하디 연한 연어의 살결에
나무처럼 단단한 한 시절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솟구치던 나무를
눈바람이 주저앉히려 할 때마다
제 근육에 새겨넣은 굴렁쇠 같이 단단한 것이
나무의 나이테이듯이
한사코 아래로만 흐르려는 물길을 거슬러
폭포수를 뛰어넘는 연어를
사나운 물살이 저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때마다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솟구쳐
여린 살 속에 쓰라린 햇살이 짱짱한 나이테로 쌓였으리라
켜놓은 원목의 나이테가
제가 맞은 눈바람을 순한 향기로 뿜어내놓듯이
그래서
연어의 살결에선 강물냄새가 나는 것이다
죽은 어미연어의 나이테를 먹은 치어가
폭포수를 뛰어넘어
다시 그 강에 회귀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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