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스크랩] 봄비에 관한 詩

cassia 2012. 3. 9. 19:11

             봄비에 관한 시

 

 

ㄱ  가시랑비 ㅡ 이 동운

        그 봄비 ㅡ 박 용래

 ㅁ     모란꽃 이우는 날 ㅡ 유치환

 ㅂ  봄밤의 반가운 비 ㅡ 두보

      봄비 ㅡ고정희.김석전.김소월.김용택.김윤배.노천명.노향림.목필균.박영근.변영로.

                심훈.안덕상.안도현.이동순.이수복.이재무. 이춘오. 장석남.장인성.정진규. 

                정한용.조용일. 허난설헌.황동규.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 ㅡ 고미경

         봄비 내리고 ㅡ고바야시 잇사

         봄비 내리는 일요일 ㅡ 김금용

         봄비 내리면 ㅡ 고재종

         봄비 내린 뒤 ㅡ 이정록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ㅡ 목필균

         봄비는 즐겁다 ㅡ송수권

         봄비 맞는 두릅나무 ㅡ 문태준

         봄비에게 길을 묻다 ㅡ 권대웅

         봄비의 저녁 ㅡ 박주택

         봄비 한 주머니 ㅡ 유안진

         봄이 멀지 않았다고 ㅡ 나태주

         비옷을 빌려입고 ㅡ 김종삼

 ㅅ     산에 봄비가 내리는데 ㅡ 대희

 ㅇ  양철지붕과 봄비 ㅡ 오규원

        연금술 ㅡ 새러 티즈데일

  ㅊ    춘분ㅡ도종환

        춘흥 ㅡ 정몽주

  ㅎ    함께 젖다 2 ㅡ 윤제림           

                                                           

 


         

    가시랑 비     이동운

   

    가시랑 가시랑

    가시랑 비                     가시랑비(가랑비) ㅡ

     간질간질 소물소물              이슬비 보다는 조금 굵지만 짧게 내리는 비

    가시랑 비

 

    뒷동산 살구꽃도

    참다 못해 하하하

    앞마을 복사꽃도

    견디다 못해 호호호

 

    가시랑 가시랑

    가시랑 비

    간질간질 소물소물

    가시랑비           

 

 

                    

 

    그 봄비          박용래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강아지풀> 민음사. 1975년

 

 


    모란이 이우는 날            유치환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부러 하염없어

뒷산 솔밭을 묻고 넘쳐 오는 안개

모란꽃 뚝뚝 떨어지는 우리 집 뜨락까지 내려

 

설령 당신이 이제

우산을 접으며 반긋 웃고 사립을 들어서기로

내 그리 마음 설레이지 않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기다림에 이렇듯 버릇 되어 살므로

 

그리하여 예사로운 이웃처럼 둘이 앉아

시절 이야기 같은 것

예사로이 웃으며 주고받을 수 있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내 안에 당신과 곁하여 살므로

 

모란은 뚝뚝 정녕 두견처럼 울며 떨어지고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부러 하염없어

이제 하마 사립을 들어오는 옷자락이 보인다

 

 

 

   봄밤의 반가운 비     두보

 

좋은 비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때맞춰 내리기 시작하네

바람 따라 밤에 몰래 숨어들어

소리도 없이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

들판 길 구름 낮게 깔려 어둡고

강 위에 뜬 배의 불빛만이 밝네

이른 아침 분홍빛 비에 젖은 곳 보니

금관성에 꽃들 활짝 피었네

 

 

  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 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 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봄비           김석전

비가 그쳤네

햇빛이 반짝어리네

세수한 산과 들이

수군거리오

"어이 시원하구려."

"어이 시원하구려."

<중외일보> 1930년 3월 19일 

 

 

  봄비            김소월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봄비1          김용택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 실처럼 날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 맘은 절반이지만

날아 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내 가슴에 묻혔던 내 모습은 그대 보고 싶은 눈물로 살아나고 그대 모습 보입니다

내 가슴에 메말랐던 더운 피는 그대 생각으로 이제 다시 붉게 흐르고

내 가슴에 길 막혔던 강물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아, 내 눈에 메말랐던 내 눈물이 흘러 내 죽은 살에 씻기며 그대 푸른 모습,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모습 보입니다

 

 

  봄비            김윤배(1944 - )

세상이 빗방울 위에 놓인다

 

겨우내 마른 소리를 내며 떠나려던 나무들이

슬며시 뿌리를 내리고 발등에 누워 젖고 있는

제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내, 지난 겨울이 저랬?가

숲이 빗방울을 조용히 내려서고

오랜 잠 괴로워했던 산갈대

툭툭 마디를 꺾는다

내, 지난 봄이 저랬던가

저처럼 작고 조용한 빗방울에 얹혀

스거운 나이를 버리면

내 굽은 그림자가 끌고 온

메마른 마음 햇솜처럼 부풀어

꽃망울 벙그는 세상을

혼자는 갈 수 있으리

내 비록 네 마음 속에

싹 틔울 꽃씨 하나 묻어두지 못한

붙임의 세월을 살았다 하더라도

 

 

  봄비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 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줄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봄비       노향림

 

지난 겨울 누우드로 버티어온 나무들이 유심히 제 몸을 들여다 본다

수없이 많이 튼 살갛을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

한때 농익은 열매 매달고 놀던 무성생식의 까만 젖꼭지를 퉁겨본다

어디서 보았을까

몇채의 집들이 들판에서 등 돌려 앉는 것을

쑥대머리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키를 늘인다

온종일 속옷이 벗겨진 하늘에선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바람들만 산발한 채 뛰어다닌다

 

스스로 물소리를 만들며

흘러가는 비, 비

 

 

   봄비2           노향림

 

빠르게 흐르는 빗줄기

라일락이 밥알 같은 꽃을 매단 주위는 온통 환했다

묵은 김칫독을 들어낸 구덩이에는 겨울의 긴 뿌리가 언 채로 드러났다

채 녹지 않은 꿈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끌려나온 흔적

이름 없는 나무들의 저 빈 가지 끝 숱한 얼굴 속 어디에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의 내가 있는지

사진첩을 펼친 듯 봄밤이 환히 어두워져 온다


 

  봄비                     목필균

 

통통 살 오른 목련

뽀얗게 속살을 드러낸다

 

으스스 떨리는 기운

소리 없이 내리는 비봇에

에취, 에취, 에취

재채기 하다가

 

봄 햇살 가득 담긴

문고리 잡아챈다

 

 

 

  봄비          박영근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데서 우레 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봄비             방원조

 

실바람 아지랭이

몰래 숨기고

언 세상 녹이려고 보슬비 와요

 

소곤소곤 봄 얘기

풀어내리면

고개 내민 새싹은 세수하지요

 

 

  봄비              변영로(1898- 1961 ) 서울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아려 -ㅁ 풋이 나는, 지난 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ㅡ

이제는 젖빛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나!

아, 안올 사람 기두르는 나의 마음!

 

 

  봄비         심훈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를 두드리시네

건반 위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 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에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 숨도 못 이루시네  

 

   봄비           안덕상. 충남 한산.

 

벌겋게 타오르는 산불 지지 누르려

너는 주룩주룩 쏟아지지만

 

너 달려오는 소리에 놀란 뿌리들

검은 산 빛 깨뜨리고

더 큰 불 지펴 놓고야 말겠다

 

마른 삭정이도 한껏 젖으며

이 밤 자고 나면

불이야, 크게 소리치며

2006년 시와 시학 신춘문예당선작

 

 

 

 

   봄비         안도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봄비     이동순

 

겨우내

햇볕 한 모금 들지 않던

뒤꼍 추녀 밑 마늘광 위으로

봄비는 나리어

 

얼굴에 까만 먼지 쓰고

눈감고 누워 세월 모르고 살아온

저 잔설을 일깨운다

 

잔설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때묻은 이불 개켜 옆구리에 끼더니

슬쩍 어디론가 사라진다

 

잔설이 떠나고 없는

추녀 밑 깨진 기왓장 틈으로

종일 빗물이 스민다

 

 

   봄비      이수복(1924 - 1986) 전남 함평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밭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풀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입 안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봄비          이재무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 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한다

빗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로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묘목을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봄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봄비 싸돌아 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봄비     이춘오

 

말라버린 나무는 모두 죽은 줄 알았다

겨우내 숨 죽인 몸짓

삶을 상실한 줄 알았다

가지를 꺾는다, 가지는 허연 속살을 보인다

흰피를 흘린다

죽은 줄 알았던 것들은

찬 바람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

봄비에 속살을 내보인 가지끝

처녀젖멍우러럼 튀어오른 새순을 본다

아!  아직 삶이 남아 있구나

그렇게 뻗대며 살아 있구나

 

 

   봄비        장석남(1965 - ) 경기도 덕적

 

풀린

물결이여 내 고요 위에

봄비는 내려와

둥글게 둥그렇게

서로서로 몸을 감고 죽는다

둥그런, 둥그런 물의 棺들

물 위로 물 속의 푸른 어둠이 솟아올라와

둥근 그 소리에까지도 푸른 어둠이 스민다

풀린

물결이여

네 몸 위에 받는 봄비는

먼데 골짜기까지도 봄이게 하며 몸을 터서 죽는다

아 너와 내가 잠들었던

이 한 덩어리 기슭의 바위에도 봄비는 와서

둥글게 둥그렇게

앉음새를 고쳐준다

 

* 봄비는 와서 둥글게 동그랗게 앉음새를 고쳐준다

 

 

  봄비              장옥관(1955 - ) 구미 .계명대 교수

 

한 올 한 올 매화 꽃가지

붉은 색실이 풀리고 있다

 

흥얼흥얼 수로를 따라 흘러드는

눈 희미한 콧노래

 

어머니, 아득한 그곳에서 재봉틀 돌리시는지

 

한 땀 한 땀

흰개미들 내려와 풍경을 꿰매고 있다

 

낡은 영화 필름처럼

느리게 느리게 재봉틀이 돌아간다

 

어머니 노루발 지나간 바느질 자국에

다시는 몸 아픈 날들 오지 않으리라

 

모든 안팎이 사라지리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랜덤하우스.

 

 

   봄비                장인성

 

네가 오는구나

손에 든 초록 보따리

그게 전부 가난이라 해도

반길 수 밖에 없는

허기진 새벽

 

누이야

네 들고 온 가난을 풀어보아라

무슨 풀씨이든

이 나라 들판에 뿌려놓으면

빈 곳이야 넉넉히 가리지 않겠느냐

 

 

 

   봄비                정진규

 

실눈을 뜨고 반쯤 잠든

나른한 슬픔에게

떠나버린지 너무나 오랜

그 여자의 알 수 없는 향기에게

삼 년째 내 방에 걸려 있는

복역 중인 내 친구

때묻은 그의 모자에게

잉크가 나오지 않는 만년필에게

값싼 볼펜에게

미구에 가득히 비어버릴 나의 지갑에게

몇 평 나의 땅 문서에게

여린 나뭇잎들 몰래 핥고 지나가는

바람의 쓸쓸한 탐욕에게

방안 가득 엎질러진 꿈

꿈을 혼자서 쓸어담고 있는

낡은 나의 언어에게

자꾸 엎질기만 하는 넘치게만 하는

나의 언어에게

새 바구니 하날 다시 줍시오

십년 넘게 주문해도 주시지 않는

인색한 나의 하느님에게

오, 나의 모든 슬품들에게

나를 버리라고 떠나가라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인다

믿을 게 없다고 기다려야 소용없다고

함께 살자고 책임지겠다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이다

 

 

   봄비          정한용

강을 건너자 비가 가늘어졌다

산발치에 닿아선 하늘까지 맑아졌다

땅은 이미 충분히 젖어

검고 부드럽게 나무 뿌리에 담았던 향을 풀어냈다

포클레인이 모래흙 한 무더기

내 키만큼 쌓아놓은 뒤였다

새로 파낸 沙土는 새 봄비를 맞아 빛이 더 맑았다

이미 마음을 궁글렸으니

세상 전부가 함께 묻힌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흙을 가리고 방향을 잡아 자리를 정한 다음

조용히 내려 놓았다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세계로 들고 있었다

구름 걷히고 햇살 퍼지면서 흙내음 진한 달구노래 들렸는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릉 산새가 날아간 것인지

산역을 마친 이들이 햇무덤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꼈다

봄비 걷히고

내 알몸 위로 울음이 쏟아졌다

<흰꽃> 문학동네.2006년

 

 

   봄비             주용일(1964 - ) 충북 영동

밤새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자다 깨어 간지러운 귀를 판다

세상 잘못 살아온 나를

어디 멀리 있는 이가 욕을 하는지

귓속 간지러움 밤새 그치지 않는다

잎에서 잎맥으로 잎줄기로 옮겨가며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내 귓속 간지러움도 달팽이관을 따라

점점 깊은 곳으로 몰려간다

세상 함부로 살아온 나를

이제는 가까이 있는 누가 욕을 하는지

뽕잎 갉아먹는 소리 갈수록 거칠어지고

자다 깨어 죄 지은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간지러운 귀를 판다

<꽃과 함께 식사> 고요아침.2006년

 

                         조르주 쇠라

 

 

   봄비              허난설헌(1563 - 1589) 강릉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바람이 장막 속 숨어 들을제

뜬시름 못내이겨 병풍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장 위에 지네

 

봄비는 보슬보슬 찬바람 숨어들제

뜬지름 못내이겨 병풍을 기대서니

담장 위에 살구꽃지며 갈 길 몰라 하더라

 

 

 

   봄비              황동규

 

조그만 소리들이 자란다

누군가 계기를 한금 올리자

머뭇머뭇대던 는개 속이 환해진다

나의 무엇이 따뜻한지

땅이 속삭일 때다

*는개 ㅡ 안개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 가는 비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목필균

 

그대가 보낸 편지로

겨우내 마른 가슴이 젖어든다

 

봉긋이 피어오르던 꽃눈 속에

눈물이 스며들어, 아픈 사랑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겨울 일기장 덮으며

흥건하게 적신 목련나무

환하게 꽃등 켜라고

온종일 봄비가 내린다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      고미경(1965 - ) 충남 보령

 

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처럼 봄비가 오네

목을 빼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야윈 나무가 끝내는 눈시울 뜨거워져

몸마다 붉은 꽃망울 웅얼웅얼 터지네

나무의 몸과 봄비의 몸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깊은 포옹을 풀지 못하네

어린 순들의 연초록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세상은 부드러워져갔네

 

숨가쁘게 달려만 가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리

가슴 안쪽에 간이역 하나

세우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군가의 봄비가 되지 못하리

 

 

 

 

 

   봄비 내리고    고바야시 잇사(1763-1827)

봄비 내리고

잡아먹히려고 남은

오리가 운다

 

 

                 잡아먹히려고 남은 오리가 아니라 ...살려고  애쓰는  소년

 

 

  봄비 내리는 일요일       김금용

 

길이 묘연하다

모퉁이를 돌자 언제부터 쫓아왔는지

봄비가 추적추적

일방통행 표지판을 지운다

뒤엉킨 수천 개의 전선 위에

빨간 신호등을 켠다

재개발한다는 어린 시절 골목

삼십 년을 살았어도 낯설어 길을 묻는다

매번 첫걸음은 설렘으로 숨이 찬다

어디쯤 왔는지 하늘은 보이지 않고

뒷등 보이며 재빨리 숨는

앞길은 이내 막다른 골목이다

우산 펴들고 길 더듬는 내 앞에

봄비는 성큼 팔짱을 낀다

혼자 나서지 못하고

왔던 길 자꾸 뒤돌아보는 미련함으로

 

 

 

   봄비 내리면         고재종

 

봄비 내리면

저 대그늘진 뒷마당의

층층 더께진 삼동얼음 녹으려나

 

봄비 내리면

저기 저 시퍼런 탱자울 너머

꿈결인 듯 유유히 앞강물도 푸릴려나

 

동네 한복판쯤에

두발 뻗고 퍼질러 앉아

딱 공딱!  되게 한번 먹이고

아이고 한울니 ㅡ임

목 넘기면

봄비 내리면

 

내 마음 속 자갈밭 귀영치에도

강파른 씨톨 하나 이윽고 눈을 떠서

이제는 하늘도 젖은 하늘 아래

저 둔덕 밑의 꽃다지며 황새냉이꽃

벌써 저렇게 차오르는 보리밭이랑

한번쯤 목메임으로 흐르려는가

 

 

 

   봄비 내린 뒤             이정록

 

개 밥그릇에

빗물이 고여 있다

흙먼지가

그 빗물 위에 떠 있다

혓바닥이 닿자

말갛게 자리를 비켜주는

먼지의 마음, 위로

통통 분 밥풀이

따라 나온다

찰보동 찰보동

맹물 넘어가는 저 아름다운 소리

뒷간 너머

개나리 꽃망울들이

노랗게 귀를 연다

밤늦게 빈집이 열린다

누운 채로 땅바닥에

꼬리를 치는 늙은 개

밥그릇에 다시

흙비 내린다

 

 

 

   봄비는 즐겁다            송수권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 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 길로 나서니 빨강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 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 소리가 들려온다

향국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 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되어 축축한 통나무들을 물고 간다

나무 찍는 우리나라 강릉 크낙새의 빨간 주둥이가 보인다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는 즐겁다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뒤발꿈치가 다 젖는다

오늘은 강가에 나가 남풍에 실려 종종걸음 치는 한 떼의 봄비

조용한 전별식을 갖고 싶다

 

 

 

   봄비 맞는 두릅나무        문태준

 

산에는 고사리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봄비에게 길을 묻다       권대웅

 

봄비 속을 걷다

어스름 저녁 골목길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담장 너머

휘파람 소리처럼 휙휙 손을 뻗어

봄비를 빨아들이는 나뭇가지들

묵은 살결 벗겨내며 저녁의 몸바꿈으로 분주한데

봄비에 아롱아롱 추억의 잔뿌리 꿈틀거리는

내 몸의 깊은 골목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저녁 여섯 시에 퍼지는 종소리는

과거 현재 미래 한데 섞이고

비의 기억 속에서 양파냄새가 나

빗줄기에 부푼 불빛들

창문에 어른거리는 얼굴들 얼룩져

봄비에 용서해야 할 것이 어디 미움뿐이랴

잊어야 할 것이 사람뿐이랴

생각하며 망연자실 길을 잃다

어스름 저녁

하늘의 무수한 기억 기억 속으로 떨어지는

종아리 같은 저 빗물들

봄비에 솟아나는 생살들은 아프건만

 

 

 

   봄비의 저녁               박주택

 

저 저무는 저녁을 보라

머뭇거림도 없이 제가 부르는 노래를 마음에

풀어놓고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봄비에

얼굴을 닦는다, 저 저무는 저녁 밖에는

돌아가는새들로 문들이 덜컹거리고

시간도 빛날 수 있다는 것에 비들도 자지러지게

운다, 모든 약이 처방에 불과할 때

우리 저무는 저녁에는 꽃 보러 가자

마음의 목책 안에 고요히 뿌리를 두고

한 눈 파는 문들 지나 그림자 지나

혼자 있는 강 보러 가자

제 몸을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은

물을 맑히며 정원으로 간다

구름이 있고 비가 있고 흰말처럼

저녁이 있다 보라 일찍이 나의 것이었던

수많은 것들은 떠나간 마음만큼

돌아오는 마음들에 불멸을 빼앗ㄱ고

배추가 어둠인 저녁은 제 몸에

노래의 봄비를 세운다

 

            * 조르주 쇠라 

  

  봄비 한 주머니       유안진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해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봄이 멀지 않았다고       나태주(1945 - )

 

봄이 멀지 않았다고 숨을 쉬라고

미루나무 삭정이 위에 까치 울음

누가누가 보았니?  족제비 봄비

마늘밭 두엄 속으로 숨었다, 족제비 봄비

 

 

  비옷을 빌려입고        김종삼

 

온 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이십팔 년 전

善竹橋가 있던

비 내리던

開城

 

호수돈 女高生에게

첫사랑이 번지어졌을 때

버림 받았을 때

 

비옷을 빌려입고 다닐 때

기숙사에 있을 때

기와 담장 덩굴이 우거져

온 종일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릴 때

 

 

 

    산에 봄비가 내리는데        대희

 

빈 산에 흠뻑 봄비가 내리고

복숭아꽃 살구꽃 울긋불긋 피었네

산중이라 꽃 피어도 보는 일 없어

저 혼자 시냇물에 그림자 드리웠네

 

 

    양철지붕과 봄비      오규원

 

오래된 붉은 양철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친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제 49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피어라, 석유!> 현대문학 2004년

 

 

 

 

 

     연금술           Sara Teasdale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꽃 들어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빗물을 방울방울 물들이는

꽃과 잎에서 나는 배울 테니까요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Sara Teasdale(1884-1933) 미국. 개인적인 주제의 짧은 서정시가 고전적 단순성과

                                     차분한 강렬함으로 주목을 받았다.

                                      <사랑의 노래>1917년. 퓰리처상 수상.

 

 

     

      춘분                       도종환

 

밤중에 봄비가 다녀갔나 보다

마당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잠결에도 비 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굴뚝새 만한 작은 새가 앉았다 날아가자

숨어 있던 빗방울 몇 알이

아랫 가지 위로 톡톡톡 떨어진다

삐종삐종 혀를 내밀어 그걸 핥아먹고는

입술을 훔치는 모과나무 꽃순이

푸르게 반짝인다

오늘은 묵은 빨래를 해야겠다

약 냄새 밴 옷들도 벗어야겠다

 

 

 

    춘흥         정몽주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밤중이라 가늘게 소리 들리네

눈 녹아 남쪽 시냇물 불어나니

새싹들 여기 저기 솟아 오르네

 

 

 

      함께 젖다 2    윤제림

 

봄이 오는 강변, 빗속에

의자 하나 앉아 있습니다

의자의 무릎 위엔 젖은 손수건이 한 장

가까운 사이인 듯 고개 숙인 나무 한 그루가

의자의 어깨를 짚고 서 있지만

의자는 강물만 바라보고 앉았습니다

영 끝나버린 사랑은 아닌 것 같은데

의자는 자꾸만 울고

나무는 그냥 듣고만 있습니다

언제나 그칠까요

와락, 나무가 의자를 껴안는 광경까지

보고 싶은데

 

손수건이 많이 젖었습니다

그새                    

 

 

 

 

출처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
글쓴이 : 새벽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