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이영주, 「저무는 사람」(낭송 이영주)

cassia 2011. 12. 5. 02:41
    이영주, 「저무는 사람」(낭송 이영주) 이영주, 「저무는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저무는 사람들. 생일은 미리 말해주자. 젖은 바람 부는 계절에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자.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이 오랫동안 편지를 쓴다. 몸을 보니 여자였구나. 상점 주인은 창밖의 간판을 세다가 저무는 사람. 단 한 명의 노파도 없는 비 오는 골목으로 음악을 흘려 보낸다.   지느러미를 감추고 들어와야 해. 여자인줄 알았는데 그림자를 보니 물고기구나. 상점에는 푸른 비늘이 가득 찬다. 그녀가 달력을 넘기는 동안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다. 노파를 보고싶은 계절이야. 생일을 견디며 물고기들이 모서리에 지느러미를 비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비린내를 풍기는 물건들. 물고기인줄 알았는데 장화를 벗고보니 딱딱한 계단이구나. 그녀는 문밖의 발들을 바라보다 밤늦도록 저문다.   고무장화를 신자. 태풍이 오기 전에 생일을 미리 말하자. 바람이 젖은 달력을 찢는다. 계단 밑, 붉은 웅덩이 속에 머리를 빡빡 민 노파가 잠들어 있다. 시/낭송_ 이영주 -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가 있음.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 중. 출전_ 『언니에게』(민음사) 이영주의 「저무는 사람」을 배달하며 홍수가 난 이웃나라의 도시를 보면서 이 시가 생각났어요. 내 속엔 비. 혹은 흩날리는 흰 눈발. 눈이든 비든 모두 물이니까, 물속을 걸어 새로운 거리에 닿아요. ‘사주까페’ 등이 내걸린 찻집 같은 데 우연히 들러 “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저무는 사람이야” 라는 말을 꼬부랑노파에게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 기분이 나쁜 건 아니고요, 그냥 좀 멜랑콜리해지는 그런 날 있잖아요. 사실, 태어나면서 저무는 게 인생이죠, 뭘 그리 상심해요. 우린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태어나는 거잖아요. 구미호처럼 텀블링을 멋지게 하고났더니 내 그림자가 물고기 모양이 되었어요. 그림자에서 물고기 비린내가 나요.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살 때 맡았던 양수냄새와 닮았어요. 나와 내 그림자 중 어느 쪽이 진짜 나에 가까울까요? 나와 내 그림자 사이에 신발을 벗은 계단이 놓이고, “문밖의 발들을 바라보다 나는 저물어요.” 오늘도, 올해도, 그렇게 저물어요. 친구들이여 안녕. 태어나면서 저무는 것처럼, 삶속엔 죽음이 반짝. 저무는 한해가 지나면 새로 태어나는 한 해가 또 반짝! 문학집배원 김선우 / 출처 :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