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실

사전을 펼쳐라" 위기의 종이사전

cassia 2007. 2. 4. 07:54
사전을 펼쳐라" 위기의 종이사전

사전을 들고 다니는 것이 '학생다움'의 기본이던 때가 있었다. 두꺼운 영어사전이 책가방을 묵직하게 해도 사전 없는 공부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불과 수 년만에 종이사전은 박물관에 갈 처지에 직면했다. 편리하고 똑똑한 전자사전과 인터넷 사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초등학생조차 모르는 단어를 만나면 '검색'부터 해보는 시대다.
사전의 형태가 진화하는 것은 대세일지 모르지만 전문가들은 종이사전의 실종이 사전의 실종으로 이어질까 우려하고 있다. 교사들부터 요즘 학생들의 고급 어휘력이 약해졌다, 문장력이 단순해졌다고 걱정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사전활용을 몸에 익혀야 사고의 깊이와 지식의 풍성함을 기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초중고생 이용 실태

"이 정도 큰 매장에서도 사전 종류를 통틀어 하루에 10권이 안 팔리는 날도 많습니다."
지난 25일 오후 찾아간 교보문고 대구지점. 사전 코너 담당자는 진열대를 차려놓긴 했지만 '잘 팔리는'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손님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임호진 파트장은 "2년 전쯤부터 사전 판매량이 매년 10%가량 줄어드는 추세"라고 했다. 그나마 최근 신학기를 앞두고 판매량이 일주일 평균 100권 가량으로 늘어난 것이 고작이다. 영한·영영사전이 이런 형편인 마당에 국어, 한자, 제2외국어 사전은 말할 나위도 없다는 것이다.
▶'종이사전'의 쇠락
종이사전이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몇 년 사이 국내 종이사전 시장의 전체 매출이 3분의1이상 떨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사양길이라는 목소리도 공공연하다. 한때 공부의 필수품이던 종이사전이 왜 이렇게 찬밥이 된 것일까.
박준택 두산동아 마케팅 과장은 '두 번의 충격파'가 있었다고 했다. 김대중 정부 당시의 국민 PC보급 운동과 4~5년전부터 불어닥친 전자사전 열풍이다. 박 과장은 "PC가 일반화하면서 온라인 사전이 도전장을 냈다면 전자사전은 결정타였다."며 "사전 시장의 주 고객이던 중·고교생들이 유행처럼 전자사전을 구입하면서 매출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현재 국내 종이사전 시장 규모를 500억 원 정도로 추산할 때 전자사전 시장은 2천억 원 가깝게 급성장했다고 말했다.
영어, 국어, 백과사전을 가릴 것 없이 종이사전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두산동아는 4~5년 전부터 종이 백과사전 사업을 접는 대신 인터넷 포털 업체에 사전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지식검색'하면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떠올리는 요즘 종이사전의 효용성을 외치는 일은 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것이다.
민중서림 관계자는 "일부 사전 출판사에서는 인건비 부담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만 임시직을 고용하기도 한다. 종이사전의 콘텐츠를 활용해 단어장이나 관련 분야 어학 시험문제 등을 개발하는데 뛰어들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전자사전은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교보문고 대구지점 지하매장에서 판매중인 전자사전은 10여 종. 가격대가 20만~30만 원으로 3만~5만 원대인 종이사전에 비해 몇 배 비싸지만 일주일에 20대 가량씩 팔리고 있다. 손바닥만한 크기지만 4~5인치 액정과 20권 안팎의 영어, 국어, 한자, 제2외국어 사전들을 망라하고 있다. 무겁고 두꺼운 종이사전이 거추장스러운 것은 당연한 얘기. 이예식 경북대 어학연구소장(영어교육과)은 "영어 강의를 듣는 초등학생 중에도 전자사전을 갖고 있는 학생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한 고교 교사는 학생들의 공부습관이 '얕아졌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책가방에 사전 넣고 다니는 학생들이 별로 없어요. 예전에는 단어 하나라도 혼자 사전을 뒤적이면서 뜻을 새기곤 했는데 요즘에는 자습서에 요약된 몇 줄을 외우고 치웁니다."

 
▶사전의 진화, '미디어 딕셔너리'와 '어린이 사전'
이런 가운데서도 사전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전자사전이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더 똑똑한 형태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면, 기존 종이사전도 어린이용 사전을 개발하는 등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전자사전은 최근 2~3년 사이 MP3와 PMP기능이 강화되면서 읽기만 하는 사전에서 읽고, 듣고, 따라 말하고, 눈으로 보는 이른바 '미디어 딕셔너리'로 진화하고 있다.
토종 전자사전 전문업체인 A사가 최근 출시한 전자사전 경우 100권이 넘는 사전과 어학교재 내용을 담아 콘텐츠면에서 국내 최대로 선전하고 있다. 180도 돌아가는 컬러 액정에는 '터치스크린' 기능이 있어 간편하게 검색과 입력이 가능하다. 화면으로 영한대역 문고의 영어 원문을 보면서 원어민이 읽어주는 자연스런 발음까지 들을 수 있다. 여기에 PC문서나 웹페이지, 이미지를 원문서 그대로 볼 수 있는 기능도 있다. 전자북, 오디오북의 '최종 진화 형태'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기존 출판사들은 어린이용 사전 시장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대학생, 중·고교생 시장은 전자사전에 빼앗겼지만, 전자사전 이용이 상대적으로 서툰 초등학생은 종이사전 시장의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출판가에 따르면 K사의 '영어입문사전' '초등국어사전', G사의 '퍼스트 영어입문 사전', '초등학생 학습국어사전', S사의 '초등영어사전' 등을 비롯해 40종 가량의 어린이용 사전들이 출판돼 있다. 어린이들이 자주 접하는 교과서, 권장도서, 어린이 신문·잡지 등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를 중심으로 색색의 삽화와 큰 활자를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대학에서도 연세대가 최근 7차 교육과정에 나오는 단어 중심의 '연세 초등사전'을 발간한데 이어 고려대도 어린이 사전을 제작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사출판사 관계자는 "출판사 중에는 아예 주력을 어린이 사전으로 돌린 곳도 있고, 심지어 유아용 사전도 등장하고 있다."면서 "자녀의 나이가 어릴수록 부모의 교육열이 높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외국 출판사에서 제작한 어린이용 영어원서 사전도 조기영어 열기 덕에 잘 나가고 있다. D출판사의 'Children dictionary'와 'First word', S출판사의 'First dictionary', L사의 'Let's go dictionary'등 10여 종. 과학, 생물을 다룬 전문 백과사전도 잘 나간다. 영어전문서점 잉글리쉬하우스 관계자는 "한 주 평균 40~50권의 어린이 영어사전이 판매된다."면서 "특히 학부모나 사설 학원에서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사전의 중요성
전문가들은 종이사전에서 전자사전, CD롬, 온라인 사전 등으로 대체되는 유행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더 심각한 문제는 사전 자체를 안보는 풍조에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남길임 경북대 국어국문과(사전편찬학 전공) 교수는 "외국 학생들이 모국어 사전을 이용하는 것에 비해 우리 학생들은 국어사전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있다."며 이런 현상이 '어휘력 빈곤'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남 교수는 "예를 들어 '죽다'라는 말도 '돌아가시다', '객사하다', '운명하다' 등 상황에 맞게 분별력 있게 쓸 수 있어야 한다."며 "최근 사전들이 실제 문학 작품에서 예문을 따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전만 잘 활용해도 고급 문장력을 기를 수 있다."고 했다.
이예식 경북대 교수도 "최근 영어교육 방식이 문법·독해위주에서 모르는 단어에 연연하지 않고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내츄럴 어프로치'로 옮겨오면서 사전을 덜 보게 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모르는 단어를 쉬운 단어로 풀어 설명하는 '패러프레이징' 실력이나 영어의 정확성을 기르려면 반드시 사전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사전활용교육(Dictionary In Education)'이 등장한 것도 이런 사전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있다. 장미향 황금초교 교사는 "학생들에게 직접 '나만의 사전'을 만들고 사전을 자주 보게 한 결과 어휘력이 부쩍 향상됐다."며 "가정에서도 사전을 가까이 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지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사전 찾는 초등학교들    
 

종이사전의 유용함에 눈을 돌린 것은 오히려 초등학교 쪽이다. 현재 초등학교 과정에서는 4학년 읽기 과목에서 처음으로 '사전찾기' 단원이 나온다. 이에 따라 각 학교에서는 사전을 활용한 교육(DIE)을 다양한 형태로 시도하고 있다. 사전에 대한 흥미를 키울 수 있는 놀이와 퀴즈를 접목한 이런 교육은 초등학생들이 사전과 친해져 어휘력을 늘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가정에서도 배워볼 만하다.
신혜숙 대구 선원초교 교사는 자신이 지도하던 4학년 학생들과 1년간 '사전과 놀기'를 했다. "TV에 방영된 한 일본 초등학교에서 아침 수업 전에 낱말찾기 하는 모습을 보고 '바로 저거다' 싶었어요."
신 교사는 우선 학생들이 자기 사전을 갖도록 했다. 초등학생용 국어사전에는 없는 단어가 많아 두꺼운 어른용을 권장했다. 아침 수업 전에 신문이나 문학작품,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읽게 하고 아이들이 모를 법한 단어를 제시, 가장 빨리 사전을 찾아 발표하는 학생을 칭찬하고 상을 줬다. 직접 찾아본 단어는 사전에 '포스트 잇'을 붙이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1년이 지나자 사전마다 손때 묻은 500~700개의 포스트 잇이 '꽃잎'처럼 나부겼다.
성과는 일기에서 바로 드러났다. "초등학생들은 특히 한자로 된 우리말에 약합니다. '품위', '훼손', '발견' 같은 것들인데 학기 말이 되자 일기에서 이런 말이 곧잘 등장하더군요." 신 교사는 학생들의 일기장에서 이런 어려운 말을 발견하면 빨간색 볼펜으로 별표를 그려주며 칭찬했다.
대구 동성초교는 지난해 한글날 4~6학년생들을 대상으로 '국어사전 찾기 대회'를 열었다. 학년별로 20개 문항씩, 10분 가량의 제한시간을 두고 교과서 등에서 나오는 어려운 단어의 뜻을 주어진 사전에서 찾아 적게 한 것. 학교 측은 이에 앞서 교내 도서관에서 사전을 찾게 하는 수업을 진행했다.
성외숙 교사는 "인터넷이나 TV에 익숙해 있다 보니 '댕기머리', '시나브로' 같은 순 우리말 어휘력도 많이 약하다."며 "자음 순서대로 사전을 넘기다 보면 단어를 입으로 계속 되뇌게 돼 찾는 동안 낱말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게 된다"고 했다. 성 교사는 "모르는 단어를 찾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용례를 접하는 것도 지식의 풍성함을 가져오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 대구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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