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태양에게 바치는 이력서 / 류시화

cassia 2006. 10. 22. 18:28

 

 

태양에게 바치는 이력서

 

1

나 태양에게 고백할 것이 있네
한때 나는 최고의 시인을 꿈꾸었으나
화살을 맞은 독수리처럼
추락하였다
시인이 될 권리를 갖고 태어나
열 살부터 다락방에서 홀로 우주를 꿈꾸었으나
구름들이 몰려와 내 둥지를
감춰 버렸다
그리하여 나 삼류시인처럼 거리를 헤매며
수년간 시를 잊고 살았다
누군가 세상의 등록장부에서
내 이름 석자를
지워 버렸다


2

나 태어나는 날
태양은 일식을 시작하고
꼬리가 여러 개인 별똥별이 날아와
점치는 여자의 눈에 박혀 버렸다
눈먼 여자의 예언에 의할 것같으면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어둠이었다
태양이여, 내 눈을 멀게 하렴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지 않도록
내 눈이 본 것과 보게 될 것들을 그리워하지 않도록
태양이여, 내 눈에게 말하렴
눈먼 자의 지혜를
진정으로 볼 것을 보고 있는 자의 지혜를


3

눈먼 여자가 나를 따라왔다
눈먼 늙은 여자가 바다 위를 걸어
나를 따라왔다
태양은 또다시 일식을 준비하고 있다



[류시화 시집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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