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월간 문학}, 1968.11)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 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구절은 <저녁에>라는
김광섭의 시로도 유명하고, 유심초가 불렀던 유행가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樹話) 김환기의 작품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환기作
그가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모더니즘의 구성이지만,
어딘지 한국적 내지 동양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모더니즘과 전통이 조화를 이루면서 한국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한 것이
이 그림의 미술사적 의의로 평가된다.
200호 가량 되는 벽 하나를 채울 정도의 커다란
캔버스에
압도되기도 하였지만 화면 전체에 가득한 푸른 색 점을 보며 작가의
진지함과 성실함이 가슴으로 와 닿았다.
“눈만 감으면 무지개처럼 환히 떠오르던 조국의 강산”을
그리워하면서
뉴욕 마천루의 협곡 사이로 쏟아지는 별빛과 같은 점들을 찍어 가며,
“모든 것은 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했던 그의 겸손함이
그림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보듯 작가가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고,
그 별 하나를 쳐다보듯 내가 작가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작가와 나는 정다운 관계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한 점 한
점 화면을 채워갔던
김환기의 구도자적인 삶 그 자체가 그림에 담겨있었다.
그 넓은 캔버스에 별 하나, 별 둘을 새겨
넣으며 노년의 화가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지 모를
숱한 인연들을 떠올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상의 많은 인구들 중 나는 점하나에
불과하지만 택함 받은 사람으로
다른 인연들과 정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된다.
마치 그의 작품은 우리네의 인생살이를 보는 것 같았으며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지 모르는
인생의 진리를 이야기 해주고 있는 듯 하다.
김환기와 윤향란의 종이작업 <종이의 시학: 명상과 몰입의 시간>展이
2005년 12월 31일까지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김환기, 윤향란부부
김환기의 종이를 매개로 한 60년대 작업과 윤향란의 종이작업을 통해
한국현대 미술에 있어 커다란 과제인 전통과 현대의 단절 없는
융화를 기리는 종이조형작업이 전시된다고 하니 올 겨울 환기미술관을 찾아
부암동 산자락의 맑은 공기와 김환기의 숨결을 다시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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