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먹다'의 의미

cassia 2006. 1. 7. 06:18
'먹다'의 의미

병술년 새해를 맞았다. 떡국을 먹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그런데 이 ‘먹다’는 말이 우리에게 너무나 다양하게 사용되는데도

걸맞지 않게 그것에 대한 연구가 너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지난 해 우리는 삶에 겁을 먹었고,

욕을 먹은 일이 있었고,

잡다한 일 때문에 애를 먹었고,

독일 월드컵을 앞둔 올 해에는 골을 먹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우리의 과학적 수준이 세계에 안 먹혔고,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가 세상을 먹어버리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 크로노스(시간, 즉 나이)를 먹었다.

온 세계가 골을 잃었을 때도 우리는 골을 먹었다고 했고,

중국 사람들이 나이를 보탠다(添)고 말하는 데도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나는 국어학자가 아니어서

‘먹는다’는 말을 어원상으로나 문학적으로 풀 재주가 없다.

하지만 언어라는 것이 아무렇게 생기는 것이 아닌,

집단무의식의 소산이라면 그 말이 내재적으로

시사하는 보이지 않는 의미의 장(場)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농경민족의 후예, 다시 말해 정착민족의 후예다.

무엇인가가 소실되어 가는 것이 유목민족의 그 근본 라이프스타일이라면

농경민족의 스타일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먹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정착과 농경을 벗어나는 문화를 가진 이 순간에도

‘먹다’는 말이 집단 무의식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잊어먹다’란 말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우연히도 영어나 독일어와도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의 for-get을 보라. 그리고 독일어의 ver-g-essen을 보라.

두 말이 가지는 어근 모두에 영어에는 get이라는 형식으로,

독일어에는 essen이라는 형식으로 모두 ‘먹다’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이 무슨 인연인가! 인류의 집단무의식은 기억하고 보존하는 것을

‘먹다’라고 표현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영어의 for-나 독일어의 ver-가 ‘유실(流失)’의 뜻을 동반하고 있다면

우리말 ‘잊어먹다’에서는 거꾸로 ‘먹다’가 그런 형식을 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잊다’라는 말이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시언어가 반대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

가령 영어의 old는 나이가 많고 적은 상태를 동시에 갖고 있다 -

우리의 ‘잊어먹다’나 ‘나이를 먹다’ 또한 ‘먹다’,

‘버리다’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더구나

타동사와 자동사라는 개념이<죽다(die)-죽이다(murder)> 뚜렷하지 않은 우리말이라면...

겁을 먹고, 애를 먹고, 욕을 먹고,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그 이면에

무엇인가가 먹히지 못하고 소실되어 버린다는 안타까운 농경민족의 애환이 담겨 있다.

어떤 의사가 "무엇을 먹어도 될까요"라는 환자의 질문에

나이만 먹지 말고 골고루 먹으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먹히는 것이라는 자조(自嘲)의 뜻이 포함된 말이리라.

나이를 먹는다, 잊어먹는다, 1등 먹었다, 차가 먹었다는 말 모두는

의도하지 않게 소멸되어 가는 시간의 법칙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세상을 삼킨다는 크로노스의 전설과도 같다.

병술년에는 너무 큰마음을 먹지 말고 차라리 골을 먹고, 겁을 먹고, 애를 먹고, 1등 먹고,

나이를 먹는 것을 잊어먹자. / 변학수(경북대 문학치료학과 교수)


hsbyun@mail.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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