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 김수영

cassia 2006. 1. 6. 21:40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군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서 포로수용소의 제십사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쓰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쓰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군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푸른 하늘을'이나 '풀'과 함께 김수영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끔 나를 되돌아볼 때 읽는 작품이다. 실천적 지식인의 고뇌로서는 안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발견하게 된 자신의 초상(肖像)을,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진솔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자유라는 이상을 버릴 수 없으면서, 싸우지도 못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소시민이 되어 버리고 만 자신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정말로 분노해야 할 것에는 침묵해 버리는 자신을 비웃는다.
  커다란 부정과 불의에는 대항하지 못하면서도 사소한 것에만 흥분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 그러한 자신의 방관자적 자세를  '모래'·'풀'·'바람'보다도 보잘것없다고 말한다.
생활에 지치고 자꾸 나약해질 때 가끔씩 들추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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