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누리

권여선, 「손톱」 중에서

cassia 2020. 4. 9. 20:02

 권여선, 「손톱」 중에서

https://youtu.be/ajW1D3eZO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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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손톱」을 배달하며


    때론 숫자를 읽는 일도 이렇게 슬플 수 있지요. 스물한 살 소희의 삶은 온통 숫자로 채워져 있습니다. 통근버스를 타고 있을 때나 늦은 밤 '24시간 짜장 짬뽕'집에 들어갔을 때나 소희는 언제나 계산을 하고 숫자로 상황을 판단합니다. 사람은 떠나도 숫자는 정직하게 남는 법. 엄마도, 언니도, 똑같이 빚만 남겨 놓은 채 사라진 소희 앞엔 숫자의 구체성만 오롯이 살아 있습니다. 어쩌자고 작가는 이렇게 아픈 인물을 우리 앞에 데려다 놓은 걸까요? 힌트는 아마도 '얼어죽을 냉동치료'에 있겠죠. 그냥 '냉동치료' 해도 되는데 작가는 굳이 '얼어죽을'을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작가는 너무너무 속상했던 겁니다. 아마도 그냥 소희가 되어버렸겠지요. 같이 속상해하며 같이 욕을 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러니 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겠죠.
     '상하차'하는 마음으로 집배원 일을 시작합니다. 엘리베이터 없는 곳이라도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올라가겠습니다. 부디, 경비실에 맡겨달라는 말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문학집배원 소설가 이기호 2020-04-09 (thu)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작가 : 권여선

출전 : 「손톱」, 『아직 멀었다는 말』 클릭要 (문학동네. 2020) p71~p73


새로운 문학집배원(문장배달)을 소개합니다.

2020 이기호, 문장배달, 문학집배원 
 

문장배달 – 소설가 이기호

 

    옛날, 시골 할머니 집에서 살 때의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찾아오던 집배원 아저씨가 있었는데, 이분은 읍내 터미널 옆 약국 건물 이층에 세 들어 사는 이십 대 후반의 솔로이기도 했다. 집배원 아저씨는 할머니 집에 들어서면 항상 자전거를 마당 한가운데 삐딱하게 세워두고 마치 제집인 양 신발을 벗고 툇마루로 올라왔다. 그러곤 할머니와 마주 앉아 군대 간 막냇삼촌이 보내온 편지를 쭉 찢어 소리 내어 읽어주곤 했다(할머니는 까막눈이었으니까). 막냇삼촌이 보낸 편지는 대부분 '아아, 그리운 어머님께'로 시작되곤 했는데(나중에 내가 다시 읽어보니 '아아' 같은 말은 없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훌쩍훌쩍 눈물을 찍어내곤 했다. 막냇삼촌 편지를 다 읽고 할머니가 내준 미숫가루도 다 마시고 난 뒤에도 아저씨는 도무지 갈 생각을 안 했다. 할머니 옆에 앉아서 읍내 미장원 남편이 또 사고를 쳤더라, 먹골 잣나무 집 박 영감님은 오늘내일하시더라, 같은 말만 한참 늘어놓았다(심지어 몇 번 낮잠도 자고 갔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는적는적 다시 자전거를 끌고 나가면서 아저씨는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에이, 일하기 싫어 죽겠네." 어린 마음에(당시 아홉 살이었다) 나는 집배원이야말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저 정도 일하고, 일하기 싫어 죽겠다는 말이 나오는 직업이라니…(그래서 나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아아, 이번 달 전기요금은…') 시간이 지나 군대 갔던 막냇삼촌이 다시 돌아오고 언제 '아아, 그리운 어머님' 같은 편지를 썼냐는 듯 매일 툇마루에 누워 물 떠와라, 선풍기 이쪽으로 돌려라, 말만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집배원 아저씨를 떠올렸다. 아저씨는 편지를 읽으면 그냥 그 사람이 되었구나, 그 사람처럼 굴었구나, 하는 생각. 그 마음으로 문장을 전할 작정이다. 아아, 추임새도 넣으면서.


이기호

   – 1972년 강원도 원주 출생
   – 199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 시작
   – 소설집 『최순덕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 장편소설로 『사과는 잘해요』, 『차남들의 세계사』, 『목양면 방화사건 전말기』 등이 있음
   – 이효석문학상, 김승옥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상
   –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