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150) '근대문학을 읽다'를 마치면서

cassia 2019. 12. 29. 01:25



(150) '근대문학을 읽다'를 마치면서

 

문학의 힘은 한 시대 특정된 인간의 삶과 나 자신, 주변 사람들로 이해를 넓혀 가는 자가 치유의 힘

대학생들에게 이광수라는 이름을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같다. "친일파잖아요."

물론 그들 대답대로다. 조선 청년들이 일본을 위한 전쟁에 끌려 나가 죽음을 맞던 일제말기, 이광수는 학도병 출전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

그렇다고 이광수가 친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십대의 이광수는 자주적이고 근대적인 조선을 이루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힘썼다. 그는 근대조선을 향한 열망 속에서 우리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썼다.

최남선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일제말기 조선 청년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일본이 중국 땅에 세운 만주국을 '왕도낙토의 실험장'이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젊은 시절 이광수와 함께 자주적이고 근대적인 조선을 이루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힘썼다. 그리고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써서 우리 근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한국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두 사람 모두 친일의 길을 걸은 것은 공교로운 일이다. 이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주요한, 김동인을 비롯한 수많은 근대문학자 역시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친일의 길을 걸었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일본제국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그들의 신념도 허물어뜨렸다.

그래서 근대문학의 흐름을 찬찬히 보게 되면 '힘'과 '이익'과 '세월' 앞에서 무너져간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이육사나 현진건처럼 칼 날 같은 현실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작가들의 삶이 더 빛나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근대문학이란 결국 근대라는 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긴 세월 동안 이어진 식민지의 굴욕적 삶 속에서 살아간 인간들의 이야기가 거기 들어있다.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누군가는 투항했다. 저항한 사람은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고, 투항한 사람은 인간의 약함과 시대의 잔혹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우리가 근대문학을 읽으면서 실제로 그런 깨달음을 얻는 것은 쉽지가 않다. 작가들이 쓴 문학작품과 그들의 삶을 일제치하라는 시대 속에서 퍼즐을 맞추듯 복원해나가야 한다. 시대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편견 없는 시선으로 문학 속 인물과 작가의 삶을 어렵게 따라가다 보면 그 나약함, 혹은 그 강함의 근거가 무엇인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이해라는 것이 근대라는 한 시대에 특정된 인간의 삶과 문학을 넘어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로 향하게 된다. 문학이 가지는 자기 치유의 힘이다.

근대문학만이 아니라 모든 문학이 지닌 힘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근대문학 읽기란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의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해는 '연민'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한 것이다.

5년 간에 걸친 '근대문학 읽기'를 통해서 내가 많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이 '연민'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 칼럼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사진(右) : 이광수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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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9-12-28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