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149) 조선의 로빈슨 크루소

cassia 2019. 12. 14. 09:12



(149) 조선의 로빈슨 크루소

 

서구 번역 소설로 '사농공상' 전통 질서 타파, 서구의 힘 알려 '새 조선' 만들려는 의도

서구 문물이 몰려들던 개화기. 중국과 일본 이외,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조선어로 서툴게 번역된 서양소설은 큰 도움이 됐다. 줄거리 중심의 어린이용으로 번역된 서양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이름조차 낯선 새로운 나라와 그 나라의 문화를 배워갔다.

소설 주인공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영국, 프랑스, 독일, 아프리카, 브라질을 방문하기도 하고, 바다 밑을 여행하기도 했다.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새로운 법체계를 접하기도 하고, 상인이 힘을 지닌 놀라운 세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딱딱한 지리책이나 역사책과 달리, 소설은 세계지리와 역사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쉽고 재밌게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었다. '로빈슨 크루소'(1791)를 번역한 최남선의 '로빈손무인절도표류기'(無人絶島漂流記, 1909)도 그 중 하나였다. 28년에 걸친 한 남자의 무인도 표류기를 다룬 이 소설에는 조선 사람들이 처음 접하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 듬뿍 담겨 있었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선원이자 타고난 장사꾼으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유럽에서 만든 공산품을 아프리카에 팔고, 대신에 아프리카의 상아, 곡물을 유럽에 가져다 팔아 큰 이윤을 남긴다.

배를 타고 영국과 아프리카, 브라질을 넘나드는 해상무역업자 로빈슨 크루소의 행보를 읽으면서 조선 독자들은 세계 지리와 문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익혀갔다. 그렇다고 최남선이 지식 전파에만 목적을 두고 번역을 진행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어로 번역된 '로빈손무인절도표류기'가 발표된 것은 한일병합조약을 1년 앞둔 1909년. 조선의 운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달해 있던 때였다. 최남선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해상무역을 통해 '재화를 축적하고 그 재화로 세계를 제패'한 대영제국의 힘을 배우기를 바랐다. 그 힘은 전통적으로 조선이 천시하고 간과해 온 것이었다.

아울러 최남선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로빈손무인절도표류기'를 읽으면서 그 힘을 배우고 키워 자주적이며 강력한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가기를 바랐다. 사농공상의 신분적 위계질서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던 조선에서 상인의 가치와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강건한 뿌리를 흔드는 역할을 개화기 조선에서 '로빈손무인절도표류기'를 비롯한 번역 소설이 담당해내고 있었다.

'걸리버 여행기', '해저 이만리', '엉클 톰스 캐빈', '레미제라블' 등등, 최남선을 비롯한 젊은 선각자들은 '소년'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고자 서구 소설 번역에 힘썼다. 비록 일본어 번역된 것을 다시 조선어로 번역하는 데 불과했지만 그들은 열심히 조선 소년들에게 유용한 지식을 전해줄 수 있는 서구 소설을 번역하고, 또 번역했다. 이미 조선은 식민지상태로 전락해가고 있었고 미래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개화기 조선에서 서구 번역소설은 그런 그들의 희망을 담고 있었다.
사진(右) : 로빈손무인절도표류기 삽화('소년', 19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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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9-12-14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