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132) 1920년대 조선과 위기에 빠진 서양 아가씨 이야기

cassia 2019. 4. 18. 16:34



(132)1920년대 조선과 위기에 빠진 서양 아가씨 이야기

 

1910년대 미국에서는 위기에 빠진 아가씨 구출기를 다룬 연속무성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와는 달랐다. 전체 내용을 부분 부분 잘라서, 한 부분을 영화관에서 일주일 간 상영하고 나면 다시 그 다음 부분을 일주일간 상영하는 일종의 연속극 형태였다. 상영이 모두 마무리 되고 나면 작가가 내용 전체를 책으로 엮어서 출판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책 역시 영화만큼이나 미국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대표적 작품 중 하나가 아서 벤자민 리브의 탐정소설 '일레인의 영웅적 행위(The exploits of Elaine)'(1915)이다. 탐정 소설 '일레인의 영웅적 행위'는 1921년 '엘렌의 공(功)'이라는 제목으로 김동성이 번역하여 조선에 소개한다.

번역소설 '엘렌의 공(功)'은 탐정소설이라고 하지만 셜록 홈즈류의 정통추리물과는 달랐다. 총격과 손에 땀을 쥐는 추격, 격투와 같은 액션은 물론, 여기에 탐정 크레이그 케네디와 아름다운 의뢰인 엘렌 간의 달콤한 로맨스까지 더해져서 오히려 로맨스 모험소설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대호평에 이어 일본에서도 영화와 소설 모두 소개되어 큰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조선에서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일단 사건 해결을 위해 제시되는 어려운 화학용어라든가, 복잡한 과학적 설명이 당시 조선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낯설었다.

이와 더불어 여주인공 엘렌의 행동거지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엘렌은 자산가의 딸로 교양을 익힌 인물이지만 정숙한 양갓집 아가씨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케네디 탐정과 공공연하게 애정을 주고받는가 하면 일촉즉발의 위기도 마다않고 모험에 뛰어드는 등 적극적이고 활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모습이 보수적인 조선사회의 정서에 맞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양에서 불어온 자유연애 바람과, 여성 해방을 다룬 입센의 '인형의 집'이 조선 젊은이들 마음을 휘젓는 통에 조선 어른들의 심사가 불편하던 터였다.

번역가 김동성이 수많은 탐정물 중에서 '일레인의 영웅적 행위'를 번역작으로 선택하고, 동아일보가 귀한 지면을 내어 이 소설을 연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김동성과 동아일보 모두 조선이 낡은 의식을 벗고, 새로운 근대문물을 받아들여 힘을 지니기를 원했다. 그 힘을 쌓고, 또 쌓아서 조선이 독립국이 되기를 원했다. 그 새로운 문물에는 남녀평등, 여성의 해방이 들어 있었다. 새로운 조선 건설은 미국유학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돌아온 식민지 지식인 김동성에게 부과된 소명이었다. 그리고 삼일운동의 열망 속에서 창간된 민족지 동아일보가 담당해야 할 사명이었다.

1920년대의 조선은 지식인도, 언론도 새로운 조선 건설을 이루어야 한다는 깊은 사명감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명감은 이데올로기도, 지방색도 뛰어 넘어 모두를 하나의 마음으로 연결해주었다. 그렇다면 2010년대 우리의 언론과 지식인은 우리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서 어떤 사명감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사진 : 영화 '일레인의 영웅적 행위(The exploits of Elaine)'(1914)의 한장면
         

        

정혜영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9,4,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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