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 (82) 나혜석과 ‘이혼고백장‘

cassia 2017. 4. 29. 17:45



나혜석과 ‘이혼고백장‘


"꽃이 지더라도 또 새로운 봄이 올 터이지. 그것이 기다리는 불가사의가 아니라고 누가 말을 할까. 그날을 기다린다. 그날을 기다린다.".

1935년 10월, 나혜석은 이렇게 적었다. 마흔이 되던 때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십삼 년 후, 오십삼 세의 나이로 시립요양원에서 외롭게 죽을 때까지 '그날'은 오지 않았다. 진명여고를 1등으로 졸업한 열여덟 살부터 조선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아온 나혜석이었다..

개화한 대지주의 딸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차례 당선되었으며, 이광수, 염상섭 같은 당대의 저명 문인과 교류할 정도로 뛰어난 작가적 재능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의 엘리트 남편까지,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삶이었다. 적어도 1927년 파리에서 최린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서른두 살 되던 1927년 6월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떠난 유럽 여행지 파리에서 천도교 도령이었던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법률 공부를 위해 베를린에 머물고 있었고 나혜석은 이국의 도시 파리에 있었다. 그리고 계절은 한여름이었다..

최린과의 열정적 사랑 때문에 나혜석이 치른 대가는 엄청났다. 돈 한 푼 없이 이혼당하고, 양육권까지 빼앗긴 것은 물론 보수적 조선 사회의 조소와 질책까지 한몸에 받았다. 그렇다면, 이혼의 원인은 오로지 나혜석에게만 있었던 것일까. 나혜석은 이혼 4년 후인 1934년 '이혼고백장'(1934)이라는 글을 발표하고는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글은 남편 김우영과의 연애, 11년간의 결혼 생활과 녹록지 않던 시댁과의 관계 등 결혼에서 이혼에 이르는 경위를 적고 있다. 이 글은 엄밀하게 말해서 '고백'이라기보다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변호'였다. 외교관 남편과 네 아이를 뒷바라지하면서 화가의 삶까지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항변이었다..

결혼 직후부터 조선 현실에서 여성이 결혼 생활과 예술을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러 잡지를 통해 호소했던 터였다. 그런 만큼 나혜석의 예술적 세계를 이해하고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남편 김우영에 대한 분노가 글에 묻어나고 있다. 약속도 지키지 않으면서 풍문에 휘둘려 이혼을 강행한 남편 김우영이 아니던가. 나혜석은 한 차례 불륜 탓에 11년간의 그 인고와 희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혜석이 살고 있던 시대는 여성의 인고와 희생이 당연시되고, 남성의 일부다처제는 여전히 용인되면서도 여성의 정절은 암묵적으로 요구되던 보수적인 조선이었다..

보수적 조선의 현실 속에서 비극적 운명에 처한 것은 나혜석만이 아니었다. 나혜석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한 두 명의 신여성 김명순, 김일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모두 한결같이 시대적 현실보다 한발 더 나간 세계를 지향했던 탓에 보상 없는 삶을 살았다. 그들이 간 지 100년이 되어가는 지금 비록 불행하게 끝나기는 했지만 우리는 여성을 나라의 지도자로 뽑기도 했다. 나혜석 같은 여성 선각자가 기다리던 바로 '그날'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이다.(사진 : 나혜석의 '천후궁'(天后宮`1926년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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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대구미래대 산학협력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7.04.29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