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 (74) 이육사 ‘청포도’가 새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

cassia 2017. 1. 7. 17:10



이육사 ‘청포도’가 새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육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우연하게 펼쳐본 이모의 노트에서였다. 노트 첫 장에 이모는 푸른색 잉크의 만년필로 한 편의 시를 정성스럽게 적어두었는데 이육사의 ‘청포도’였다. 여름이었고, 나는 외가의 대청마루에 배를 깔고 엎드려 만화를 그리고 있던 중이었다. 햇살이 마당의 포도 넝쿨과 맨드라미 꽃 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로 시작되는 시 ‘청포도’(1939) 속, 청포를 입은 손님이 한여름 낮 외가의 마당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날의 기억이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청포도’가 준 감흥이 상당히 컸던가 보다.

‘청포도’가 발표된 1939년 여름의 조선은 시를 통해 묘사된 곳과는 달랐다. ‘청포’를 입은 손님이 ‘고달픈 몸’을 누일 곳도, 그 손님을 위해 ‘하얀 모시수건’을 곁들인 ‘은쟁반’에 청포도를 담아낼 여력도 없는 곳이었다. 무용가 최승희가 그해 6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보살춤을 공연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지만 그것은 최승희 개인의 영광일 뿐이었다. 중일전쟁(1937)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점점 더 암울하고 피폐해지고 있었다. 최승희의 보살춤 발표 1주일 후, 중일전쟁에 참전한 조선인 지원병 이인석이 중국 산시성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이어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 본토와 여러 식민지 땅으로 강제 징용되어 갔다. 이런 암울한 상황은 동북아에 한정된 일은 아니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전 세계가 전쟁의 광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해 이육사는 서른여섯 살이었고 혼란스러운 외부 상황과 달리 그의 삶은 고향을 떠나온 18년 이래 가장 평온하고 안정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조선 독립과 혁명 운동을 위해 중국과 조선을 오가고, 17차례나 수감되는 등 ‘휴식’을 취해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아온 그였지만, 그 즈음에는 글을 쓰면서 때로는 여행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4년 후 다시 북경으로 들어가 무장혁명을 위한 무기 반입 계획을 세우다가 체포된 것을 보면 그는 쉼 없이 독립과 혁명을 준비하며, 중국 대륙의 차가운 바람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청포도’ 속 그 해사한 여름 풍경을 만끽하고 있던 이육사는 누구였을까.

이육사가 가르쳐 주는 삶의 진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그는 ‘한 발 재껴 디딜 곳조차 없’는 ‘서릿발 진 칼날’과 같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이육사였기에 ‘청포도’의 그 해사한 풍경, 따뜻한 미래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광수도, 김동인도, 채만식도, 염상섭도 보지 못한 그 희망을 이육사만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이역 땅, 북경의 감옥에서 삶을 마감한 이육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삶의 교훈이 아닐까. 그가 죽은 지 벌써 70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큰 혼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디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바른 방향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만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사진 :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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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대구미래대 산학협력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7.01.07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