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 (5) '연애' 없는 연애소설 '무정'

cassia 2014. 3. 8. 14:57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연애' 없는 연애소설 '무정' 

2014.03.08 : 07 :37 :44

 

이광수의 '무정'(1917)에는 '사랑'과 관련된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두 주인공 이형식과 김선형이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것이다. 동경 유학생 출신의 남자 주인공 이형식은 어느 날 약혼녀 김선형에게 '선형 씨는 나를 사랑합니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하여 김선형이 나타내는 심적 반응이 상당히 의외다. 그 심적 반응의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난감해한다.

 

도대체 무엇을 묻는지 질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어서이다. 둘째, 불쾌해진다. 저런 질문은 기생에게나 하는 질문이므로 이형식이 어디 기생들과 놀음에서나 하던 행동을 자신에게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셋째, 머리가 소란스러워 빠개질 듯하게 된다. 지아비에 대한 섬김의 마음 이외에는 배운 것이 없는데 배운 적이 없는 것을 물었기 때문이다. (사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의 이광수)

 

'사랑'이라는 단어로 인해서 이처럼 편두통을 일으키게 된다면 과연 이들을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분명히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며, 최초의 연애소설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사랑을 확인받은 여주인공이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17년과 2014년, 100년간의 시간적, 문화적 거리를 건너뛰어 볼 필요가 있다.

 

김선형이 살았던 시대는 보수적이었다. 그 시대는 과년한 딸이 남자 선생님과 체조를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아버지들이 학교로 뛰어들어 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집에 끌고 간 시대였으며,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앉아 예배를 보던 시대였다. 선화당이 도청으로 바뀌고, 화륜선이 들어오고, 기차가 달려도 아버지들은 딸들에게 은장도를 건네주며 한 여자는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정절의 유교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신식 헤어스타일에 여학생 복장을 하고, 영어와 세계지리를 배워도 김선형의 내면은 여전히 전근대적 조선시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이형식 역시 마찬가지다. 선형이 지아비에 대한 섬김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형식은 지어미에 대한 지배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형식에게 선형은 가르치고 보살펴줘야 할 어린아이에 불과한 존재이다. 아울러 그는 기생을 강간하는 행위는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잔혹한 남성중심주의적 일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여성을 욕정 해소의 대상이나 소유물로만 보던 전근대적인 남성중심주의적 사고가 이형식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무정'은 지배와 복종으로 얽혀 있는 이들 두 젊은이가 '존경과 이해'에 기반한 평등한 남녀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사랑'은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부수적 산물이며, 소설이 끝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두 사람 간에 생겨날 조짐이 보일 뿐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 중 누구도 이 소설을 두고 연애소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100년 전의 조선에서 이 소설은 유림들이 상경하여 항의 데모를 할 정도로 파격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연애소설이었다. 역사에 대한 이해란 현재의 시점이 아니라,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볼 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연애와 성에 대해 너무나 개방적인 현대 젊은이들이 '무정'을 읽게 될 때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진다. / 정혜영 대구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출처 / 매일신문 2014.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