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 (2) 하와이로 이민 간 신명여고 여학생

cassia 2014. 1. 18. 09:15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하와이로 이민 간 신명여고 여학생 
 
대구 최초의 여학교는 1907년 미국인 선교사 부인이 설립한 신명여학교, 지금의 신명여고이다. 신명여학교는 지금의 동산병원 안쪽에 위치했던 동산 선교부 구내의 여자손님용 주택을 개조하여 교사로 사용하였다. 1912년 세 명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는데, 그 중 한 명이었던 이금례는 하와이 이민 1세대이다. 이금례가 생면부지의 땅 하와이로 갔던 것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는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1886년 설립한 이화학당,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이다. 이화학당 최초의 학생은 정부 고위 관리의 첩이었는데, 그 관리는 자신의 첩이 열심히 영어를 익혀서 왕후의 통역관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처럼 1890년대의 조선은 아직도 여성에게는 열려 있지 않은 곳이었다. 1900년대가 훨씬 지나서까지도 대구를 포함한 주요 도시 여학교 학생의 대부분은 기생, 기생의 딸, 첩의 딸 등 조선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인 이광수 '무정'에는 이러한 시대의 풍속이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야기는 동경유학생 출신의 가난한 신청년 이형식, 부호의 딸인 여학생 선형, 몰락한 양반의 딸인 기생 영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선형은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재원이며, 미인인데다가, 조선의 세력가인 김 장로를 아버지로 두고 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완벽한 선형에게 하나의 결함이 있었다면 어머니의 신분이다. 선형의 어머니는 평양 명기 부용이라는 인물로, 김 장로의 첩이었는데 본처가 죽자, 그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선형이 1910년대 조선에서 여성이면서도 신식교육을 받고, 미국유학 기회까지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첩의 딸’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전통적 조선사회에서 첩의 딸인 선형에게 허용되는 신분은 첩 혹은 기생밖에는 없었다. 선형은 첩의 딸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보수적 유교 윤리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첩의 딸이었기 때문에 전통적 조선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누구보다도 더 강렬하게 희구할 수밖에 없었다. 기생 영채가 소설의 말미에서 여학생으로 환골탈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영채나 선형과 같은 여학생들이 일본이나 미국유학을 마친 후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 앞에 펼쳐진 현실은 여전히 차가웠다. 일단 신교육을 받은 남성들은 조혼풍습에 따라 이미 유부남이 되어 있어서 결혼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일자리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는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이 상황에서 많은 여학생들이 부호의 첩이 되거나, 유부남 신청년들과의 부도덕한 사랑에 빠져 사회적 지탄을 한몸에 받는다.

 

동경유학생 출신의 신여성 나혜석은 천도교 지도자였던 유부남 최린과의 사랑으로 인해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하고, ‘사의 찬미’를 부른 성악가 윤심덕은 와세다 대학 유학생이자 희곡작가였던 연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초기 ‘여학생’들이 이처럼 시대적 보수성과 격렬하게 부딪친 덕분에 시대는 조금씩 여성을 향해 문을 열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구 신명여학교 최초 졸업생 이금례가 ‘사진결혼’을 하면서까지 하와이로 간 것은 그녀 역시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와이에 도착해서 겪은 현실이 그녀의 꿈처럼 전개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우측사진/ 1927년 남편 김우영과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나혜석.

 

정혜영 대구대학교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출처 / 매일신문 201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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