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씻은 듯이 - 이상국

cassia 2017. 5. 29. 04:34

씻은 듯이

 

-이상국(1946~)  

씻은 듯이,
이 얼마나 간절한 말인가

 
누이가 개울물에 무 밑둥을 씻듯
봄날 천방둑에 옥양목을 빨아 널 듯

 
혹은 밤새 열에 들뜨던 아이가
날이 밝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르튼 입술로 어머니를 부르듯

 
아, 씻은 듯이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인가

 

 
시인의 말처럼 나도 정말 ‘씻은 듯이’라는 말이 그립다. 세상의 모든 환자가 씻은 듯이 다 나아 만세를 부르며 막 퇴원해 나오는 그런 환상. 미세먼지가 다 걷히고 세수한 듯 맑은 파란 하늘이 살짝 펼쳐질 때. 옛날 설화 속에 나오는 어느 문둥이가 신비의 동굴 속에 들어가 씻은 듯이 병을 고쳐 미남자가 되어 나왔다는 이야기며 산속의 우물물을 마시고 노파가 소녀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씻은 듯이 고치는 변신에 대한 갈망. ‘씻은 듯이’란 말 속에는 그런 환상이 들어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나라가 갑자기 씻은 듯이 말쑥해질까마는 그래도 적어도 씻은 듯이 깨끗해지고자 하는 이 열망. 시인의 말처럼 “아, 씻은 듯이” 그런 곳에 살고 싶다.
 
<김승희·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2017.05.29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