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영화

바실리 칸딘스키 ‘푸른 하늘’

cassia 2017. 5. 22. 04:13

[이야기가 있는 그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 바실리 칸딘스키 ‘푸른 하늘’ 2017-05-22 (월)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것 같은 형상들
 보기만 해도 마음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


 수영을 배울 때, 노래할 때, 악기를 연주할 때, 주사를 맞을 때, 면접을 볼 때, 이 모든 것의 기본은 힘을 빼는 것이다. 힘을 빼야 물에 뜰 수 있고, 목소리가 멀리 나갈 수 있고, 악기를 부드럽게 연주할 수 있고, 주삿바늘도 들어가고, 면접에서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힘만 빼면 되는 이 쉬운 것이 왜 그렇게 힘든지 모를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긴장해서 승모근이 잔뜩 굳어있고, 이런저런 역할에 매여 옴짝달싹 못하는 우리를 무장 해제하게 만드는 그림.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의 ‘푸른 하늘’이다. 넓은 하늘에 화려한 부유물이 원래부터 무게가 전혀 없었다는 듯이 둥둥 떠 있다. ‘아! 나도 저렇게 자유로워봤으면’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일흔이 넘은 나이, 칸딘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에 완성한 것으로, 노대가의 노련함과 원숙미, 세상을 초월한 경지가 느껴진다. 그런데 저 푸른 하늘에 풍선처럼 떠 있는 알 수 없는 물체들은 뭘까?


세계적인 조형학교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칸딘스키는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파리로 갔다. 당시 파리는 광학기기가 발달하던 시기인지라 이곳에서 현미경으로 세포를 접하게 되었다. 눈으로 보이는 자연이 아닌, 미시의 형태는 칸딘스키에게 신세계였고, 이를 계기로 지금껏 추구했던 추상적 이미지를 더욱 심화시켰다.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듯한 형상들은 파란 하늘 안에서 자유로움 그 자체다. 생명체 같기도 하고 고대 상형문자 같기도 하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 끝에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운 형태가 탄생한 것이다.


칸딘스키는 미술뿐 아니라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콘셉트로 작업을 했다. 무용가의 동작을 지켜보며 점과 선으로 수도 없이 스케치했을 뿐 아니라 “점은 음악적 형식과 연관되어 있다”며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점과 선으로 옮기기도 했다. 또 조성을 없앤 무조음악의 창시자 쇤베르크에게 “당신의 음악 속 각 성부는 독립된 생명체들인데 그것은 내가 추구하는 바와 같다”고 편지를 보냈다. 이렇게 무용, 음악에서 미술적 형태와 색감, 구성 등의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그림에는 율동미, 리듬감이 돋보인다. 이런 감각은 ‘푸른 하늘’에도 잘 드러나 있다.


“추상예술은 이야기를 하는 문학적 유형도 아니고,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재현예술도 아니다. 순수 회화적인 요소를 통해 일어난 자극의 총합이다. 극적인 것, 폭발, 충돌, 실망, 진동, 분산, 균형, 부활, 냉담, 정지, 과열, 은폐, 서늘함, 달콤함, 견제, 해소, 파괴, 정중동, 동중정이다.”


칸딘스키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점·선·면’, ‘회화적인 요소의 분석을 위하여’ 등의 저서를 남겼다. 추상화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세한 의견을 쓴 것일까?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간단한 형상에 담긴 함축된 의미가 커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 보는 것은 물질이다. 그러나 그 물질 속에는 추상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숨겨져 있다. 정신은 힘이고, 모든 것에 파고드는 원리다. 물질은 서로 다르지만 상호 의존하고 있어서 모두가 물질인지, 모두가 정신인지 결정할 수조차 없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보일 것 같은 것, 이 알쏭달쏭한 세계를 담은 ‘푸른 하늘’은 칸딘스키의 말처럼 하늘 안에서 서로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푸른 하늘에 유유자적 떠 있는 저 화려한 물질을 보니 “하늘은 쉽고 땅은 간단하다”는 옛 고전의 문구도 떠오른다. 굳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그림이다. 함축미의 완결판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무정형의 세계, 즉흥, 유연함이 담긴 칸딘스키의 그림은 난해하면서도 어찌 보면 쉽게 다가온다. 좀 더 나아가 공간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하늘에 떠오르는 물질의 상승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생생한 색감은 어떻게 살렸는지를 살펴본다면 작은 우주를 보는 것 같아 더 신비롭다.


팀 버튼의 영화 ‘미스 페레그린과 아이들’을 보면 늘 납 신발을 신고 다니다 신발을 벗으면 가벼워져 수소 풍선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주인공이 나온다. 마치 납이 달린 것처럼 몸과 마음은 천근만근이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강요에 떠밀려 벼랑 끝에 서있는 우리.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인 것 같은 기분으로, 저 푸른 하늘 속 부유물처럼 몸에 힘 좀 빼 보자. 가끔은 나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해도 되지 않을까?


이지현 문화칼럼니스트


<그림 설명>
바실리 칸딘스키 ‘푸른 하늘’, 1940년, 캔버스에 유화, 100×73<E6AF>, 퐁피두센터

 

출처 / 한국교직원신문2017-05-22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