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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으면서까지 남긴 빛의 아름다움 - 클로드 모네 '수련'

cassia 2017. 4. 26. 21:47

[이야기가 있는 그림]

빛을 잃으면서까지 남긴 빛의 아름다움 - 클로드 모네 '수련' 2017-04-17 (월)

 

품마다 다양한 기법 실험한 연작
과도한 빛 관찰로 말년에 시력 손상

 


“윙~윙”


귓전 어디선가 들려오는 위압적인 벌 소리. 그런데 한 마리가 아니라 벌이 떼로 달려든다면 어떨까? 러시아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1분 남짓한 짧고 강렬한 곡 ‘왕벌의 비행’에서 이 장면을 기가 막히게 재연했다.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도 ‘벌 소리’라고 단번에 알아차릴 정도다. 엄청난 속도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주자를 보면 ‘벌이 날갯짓하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겠다’ 싶다. 실제로 벌의 노동량은 하루에 마라톤을 두 번 하는 정도와 맞먹는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타고난 천재라고 생각하는 예술가들도 벌처럼 쉬지 않고 성실히 작업한 경우가 꽤 많다. 해군 장교에서 작곡가로 직업을 바꿔 자리를 굳힌 림스키 코르사코프 역시 벌처럼 일했다. 베토벤은 곡을 고치고 또 고쳐서 악보가 너덜너덜해질 때가 많았고, 모네는 빛의 변화를 추구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같은 주제의 작품을 수도 없이 그렸다.


‘빛은 곧 색채’라는 신념을 고수하며 빛에 따라 달라지는 사물을 탐색한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 ‘수련’, ‘루앙 대성당’ 연작을 보면 태양이 떠서 질 때까지 하나의 대상에 얼마나 몰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같은 장소, 같은 대상을 그리고 또 그린 것일까?


위의 그림은 모네가 1897년부터 세상을 떠난 1926년까지 매달린 ‘수련’ 연작 중 하나다. 쉰 살 넘어서 파리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도시, 지베르니로 이사해 정원을 가꾼 모네는 연못을 만들고, 그 위로 아치형의 다리를 놓았다. 서양 정원에 보통 분수는 있지만 연못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일본의 유명한 목판화가 히로시게의 작품을 보고 ‘일본식 다리’를 만들었고, 그 위에서 연못을 내려다보며 ‘수련’ 연작을 완성한 것이다. 연꽃이 물 위에 환영처럼 떠있고, 물감을 십자형으로 두껍게 칠해 독특한 질감을 보여주었다.


여행, 요리,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던 모네는 지베르니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가난했다. 하지만 이후 유명세를 얻으며 형편이 좋아졌고, 지베르니에 있는 집과 정원을 공들여 가꾸고 그렸다. 특히 ‘수련’은 죽기 직전까지 모네가 평생 매달린 꽃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다.


“물체에 고유색은 없다. 색채는 빛의 변화와 함께한다.”


빛이 비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동감,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포착한 모네의 연작을 보면 같은 제목, 다른 느낌이다. 특히 모네 스스로 “나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라 칭한 ‘수련’ 연작은 작품마다 다양한 기법을 실험했다. 말년에 힘을 쏟아부은 ‘수련’ 시리즈는 가로 2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크기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꽃의 형태는 분명치 않고 빛과 색채에만 몰입한 모습이다. 보라색과 초록색, 푸른색을 두껍게 겹쳐 발라 연못의 표면, 수면 아래로 굴절되는 빛의 효과까지 담아냈다. 풍경화를 넘어서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로움, 본질을 묻는 우주적 시선을 보여준다.


모네는 다양한 빛과 색을 관찰하느라 15개나 되는 캔버스를 세워놓고 한꺼번에 작업하기도 했다. 이렇게 온종일 빛을 보며 작업하다 보니 시력이 크게 손상됐고, 말년에는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 ‘수련’ 연작은 빛을 사랑한 화가가 빛을 거의 보지 못하면서 그린 슬프고도 아름다운 기록인 셈이다.


뒤늦게 작곡가로 전업해 많은 작품을 남긴 림스키 코르사코프, 귀가 안 들릴 때까지 작곡에 몰두한 베토벤, 앞이 안 보일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린 모네. 이렇게 인생을 바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기에 그 앞에서 우리는 감동할 수밖에 없나 보다. 파닥거리며 부지런히 날갯짓하는 벌처럼 무던하고 성실하게 작업한 이들의 작품 앞에서 현실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조화와 자유로움 속에서 문득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이지현 문화칼럼니스트


출처 / 한국교직원신문 2017-04-17 (월)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870만 달러(약 224억 원)에 낙찰된

Claude Monet '수련' (1906년). 인상파 대표작 중 하나다.

 

흰색 수련 연못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99년, 캔버스에 유채, 89×93cm,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