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황동규, 「겨울밤 0시 5분」(낭송 / 김민정)

cassia 2016. 12. 4. 09:16

황동규, 「겨울밤 0시 5분」(낭송 / 김민정) 


 


황동규, 「겨울밤 0시 5분」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터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마을버스 종점, 미니 광장 삼각형 한 변에

얼마 전까지 창밖에 가위와 칼들을

바로크 음악처럼 주렁주렁 달아놓던 철물점이 헐리고

농산물센터 ‘밭으로 가자’가 들어섰다.

건물의 불 꺼지고 외등이 간판을 읽어준다.

건너편 변에서는 ‘신라명과’가 막 문을 닫고 있다.

 

나머지 한 변이 시작되는 곳에

막차로 오는 딸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듯

흘끔흘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키 크고 허리 약간 굽은,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무엇인가 외우고 있다.

그 옆에 아는 사이인 듯 서서

두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리 가볍게 치다 만 것 같은 하늘에 저건 북두칠성,

저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아 오리온,

다 낱별들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여자가 들릴까 말까 그러나 단호하게

‘이제 그만 죽어버릴 거야,’ 한다.

가로등이 슬쩍 비춰주는 파리한 얼굴,

살기(殺氣) 묻어 있지 않아 적이 마음 놓인다.

나도 속으로 ‘오기만 와봐라!’를 몇 번 반복한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시 / 황동규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가』『어떤 개인 날』『풍장』『외계인』『꽃의 고요』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송 / 김민정

출전 /  겨울밤 0시 5분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음악 / 자닌토

애니메이션 / 강성진

프로듀서 : 김태형

 

황동규, 「겨울밤 0시 5분」을 배달하며


막차를 기다려본 적 있으신지요. 길게 목을 빼고서 가족을, 연인을 기다려보셨겠지요. 우리는 막차까지 기다리는 동안 여러 겹의 감정을, 움직이는 마음을 경험해요.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화내고, 또 연민을 느끼지요. 흥얼흥얼 입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한숨을 길게 내쉬고, 혼자 중얼거리지요. 우리는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여러 표정을 지으며 지금 내 곁에 꼭 있어야 할 누군가의 부재를 경험하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알게 되지요. 삶이라는 게 결국 이 ‘형편의 전환’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환하게 살아있게 한다는 것을. 눈발이 마구 날리다 뚝 긋는 것, 상점들이 셔터를 올리고 내리는 것, 가게가 헐리고 꼭 그 자리에 새 가게가 들어서는 것, 구름에 가려서 안 보이던 별이 총총 돋는 것, 혜성이 먼지의 몸을 얼렸다가 녹이면서 빛을 내뿜는 것, 이런 형편의 바뀜이 ‘삶의 맛’ 아닌지요. 그리고 앞의 형편과 뒤의 형편은 불과 ‘한 정거’ 정도 떨어져 있지요.

 

문학집배원 문태준 2009-12-21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