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선술집」(낭송: 원창연)
선술집
고은
기원전 이천년쯤의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시’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땅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다니!
그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더 드시굴랑은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 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냐
● 詩 – 고은 : 193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958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첫 시집『피안감성』부터 시선집 『어느 바람』, 서사시 『백두산』, 연작시편 『만인보』, 최근에 펴낸 시집『허공』을 포함해 150여 권의 저서가 있음.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중앙문예대상, 단재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과 스웨덴 시카다상, 캐나다 그리핀공로상 등을 수상함.
● 낭송 – 원창연 : 배우. 가극 『금강』『백두산』, 노래극 『구로동연가』『우리들의 사랑』, 영화『세기말』『주홍글씨』 등에 출연.
고은「선술집」을 배달하며
불사의 비결을 찾아 나선 영웅의 파란만장한 행적도 결국 이렇게 선술집 주모의 단출한 말 한 마디로 갈무리되는군요. “비결은 무슨 비결 / 술이나 한잔 더 드시굴랑은 돌아가셔라오.” 주모의 구수한 말투는 이국의 신화 속에서가 아니라 해남 땅끝 어디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요. 그 땅끝에 하필 선술집이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고 돌아서는 인간에게 위로주 한 잔 건네려는 신의 배려가 아닐까요. 죽음이란 잠처럼 필요한 것, 주모 씨두리가 건네는 술 한 잔이 길가메시에게 망각의 잠을 선사해 주었을 거예요. 시력 50년을 넘긴 시인에게 시의 비결을 여쭈어도 마찬가지,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하고 돌아가라”고 대답하시겠지요.
2008. 12. 8. 문학집배원 나희덕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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