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이병률,「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낭송 이지완)

cassia 2015. 12. 29. 11:38

이병률,「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낭송 이지완)

 

 

이병률,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에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 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시_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과 여행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가 있다.

낭송 – 이지완 – 배우. 연극 , 등에 출연.

출전_ 찬란 『찬란』(문학과지성사)

음악_ 이원경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이병률,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를 배달하며


꽃과 향을 품에 안고 마늘 냄새 속에 살아낸 한 해였다.

우리는 마늘을 까는 할머니이고 술에 취해 꽃을 버리고 돌아가는 취객이다. 시대를 언어로 투시하고 가장 정직하게 현실을 노래하려고 했지만 이 땅의 언어는 어느 때보다 오염된 언어, 폭력의 언어가 난무한 해였다. 마치 창문을 열고 숨을 쉬듯이 문학집배원을 읽어주신 분들과 멀리 버클리에서, 모스크바에서, 마드리드에서 집배원을 기다려 주신 분들께 사랑을 전한다. 환하게 착하게 새해를 기다리며…….

 

문학집배원 문정희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 별뜨락새벽산책 시&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