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장석남,「가을 저녁의 말」(낭송 정인겸)

cassia 2014. 11. 25. 09:24

장석남, 「가을 저녁의 말」(낭송 정인겸)

 

 

 

장석남, 「가을 저녁의 말」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

 

윽박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 자루들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러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시_ 장석남 - 장석남(1965~ )은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뺨에 서쪽을 빛내다』등이 있다.

낭송_ 정인겸 - 배우. 연극 '2009 유리동물원', '맹목' 등에 출연.
출전_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제이
프로듀서_ 김태형


장석남, 「가을 저녁의 말」을 배달하며

 

나뭇잎은 물들고, 물든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여름 지나 어느덧 가을 저녁, 나 스스로 내 삶과 운명 따위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하고, 《주역》을 뒤적이며 선험과 예지를 구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런 가을 저녁은 대체로 고요하고 평화스러웠는데, 그 평화 속에서 몸과 마음이 어김없이 깊은 내상(內傷)을 남기는 전쟁을 치르곤 했었지요. 조락(凋落)과 더불어 온 가을 저녁 으스름 속에서 천지간을 물들인 고요와 게으른 평화를 집어내는 시인의 시력은 참 놀랍네요. 가을 저녁은 고요에 잠겨 있는데, 하늘에는 윽박질린 달이 뜨고, 국방색 모래 자루들에서는 모래가 게으르게 흘러내리고, 문득 횃대에서 추락한 닭은 날개를 푸드덕거리지요. 그건 달과 모래 자루와 닭이 감당해야 할 소임이었던 것이지요.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아랫목에서 등을 지지며 생각하니, 이 가을 저녁 우주 속에 펼쳐진 최대의 난제는 과연 횃대에서 떨어진 닭이 다시 횃대에 올라가 평화스런 잠을 잘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문학집배원 장석주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 바람과 별이 쉬어가는 뜨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