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cassia 2014. 8. 18. 15:55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1945~  )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시집『바리연가집』 실천문학사, 2014. / 바람과 별이 쉬어가는 뜨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