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김병호, 「세상 끝의 봄」(낭송 김병호)

cassia 2013. 5. 7. 08:54

    김병호, 「세상 끝의 봄」(낭송 김병호)

     

     

     

    세상 끝의 봄 - 김병호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싸놓은 이삿짐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느냐고
    물어오는 시퍼런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시·낭송_ 김병호 –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97년 《월간문학》,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 연구서 『주제로 읽는 우리 근대시』가 있다. 2013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출전_ 밤새 이상을 읽다 ☜ 클릭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문학수첩)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김병호, 「세상 끝의 봄」를 배달하며

     

    다른 것이 아닌, 꽃을 쓰는 일에는 무슨 생각이 딸려 오는지요. 꽃을 쓸어 묻는 일에는 무슨 기억이 딸려 오는지요. 살아온 기억보다는 그 너머의 것, 세상에 오기 전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것만 같지 않는지요?

     

    신(神)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한 영혼이 있습니다. '이쪽'의 삶에 묻어나는 질문의 무늬들이 끝내 지워지지 않아 견습 수행자가 된 한 영혼이 있습니다. 막 시작한 또 다른 생이 목련 꽃의 낙화들을 쓸고 있습니다. 멍이 든 얼굴들을 쓸고 있습니다. 어머니였다가 아버지였다가 또, 한때 보고 싶은 이였다가 이내 빗자루 끝에 쓸려가는 부질없는 얼굴들.

     

    실은 목련도 밤새 서성이고 망설이며 보따리를 싸서 떠나온 꽃인지 모릅니다. 멀고 먼 밤을 걸어서 온 꽃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 견습 수녀님, 제 얼굴을 쓸고 있는 목련 나무인지 모릅니다.

     

    세상의 '중심'에 서는 일의 내력이 이러할 것입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의 시배달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