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김경인,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낭송 박경미)

cassia 2012. 11. 19. 13:49
    김경인,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낭송 박경미) 김경인,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 선생님, 여기는 국경입니다. 어두운 밤 희미한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처럼 나는 몇 개의 선이 다시 정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요, 다툼은 늘 있죠. 눈을 감으면 하얀 종잇장 위로 눈과 코와 입이 점령군처럼 몰려오고 나의 손은 속수무책 들끓습니다. 어제의 채굴꾼들은 일손을 놓고 말합니다. 파헤쳐도 도무지 아무것도 없어, 산산조각 난 거울 조각이구나 자기 그림자에 반한 정물이구나 너의 핏줄은 나의 것처럼 붉고 너의 심장은 내 안에서 두근거린다. 너의 바닥에서 일렁이는 저것은 무엇인가 너의 유물은 무엇인가 선생님, 진심을 다해 당신과 피를 나누고 싶어요. 모든 색깔을 다 먹어치우고 검정을 이해하게 된 물고기처럼 그러나 사실은 검정을 모르는 물고기처럼 여러 개의 표정이 얼굴 위에 앞다투어 떠오를 때 두려움을 감추려 더욱 잔인해지는 병정들을 일사불란하게 다뤄야 하는 장수처럼 당신은 나의 아슬아슬함 속에. 빛과 어둠이 섞이는 은회색의 혼돈을 친화라고 부르듯이 모래알과 모래알이 서로를 모르는 채 해변을 완성하듯이 당신이라는 먼지 속에서 나는 떠오르면서 먼 초록이 가까운 초록을 다 잊기까지 망설임 속에서 놓일 자리를 찾는 바둑알의 심정으로 색깔 안에 나를 구겨 넣는 시간입니다. 선생님, 여기는 국경입니다. 이제 곧 그어질 몇 개의 철책 속에 나는 가득 담기고 나는 비로소 다시 태어나고 나는 나의 바깥을 향해 빙긋 웃습니다. 총을 겨누듯이 시_ 김경인 -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다. 시집 『한밤의 퀼트』『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낭송_ 박경미 - 성우. 라디오 드라마 <파한집>, 마당극 <신흥부놀부뎐> 등에 출연. 출전_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민음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김경인,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을 배달하며 시의 다른 부분과 어우러지지 않는 듯한 4연을 읽고 또 읽어본다. 너의 핏줄은 나의 것처럼 붉고 너의 심장은 내 안에서 두근거린다. 너의 바닥에서 일렁이는 저것은 무엇인가 너의 유물은 무엇인가 갑자기 이게 웬 애먼 말씀일까…. 처음엔 난감했는데, 두 가지 해석의 눈과 코와 입이 떠오른다. 그 중 아슬아슬한 해석은, 이 뜬금없어 보이는 구절이야말로 이 시의 단서라는 것이다. 시인이 숨기고 있는, 정작 하고 싶었으나 참고 참았던 말이라는 것. 그 경우, 다른 부분들은 4연에서 기인한 화자의 불안하게 들끓는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이 지금까지 믿었던 선을 다 지워버리고 나를, 그리고 우리(너와 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고 싶은 시간이 되는 셈이다. 좀 덜 아슬아슬하게 해석하자면, 4연은 ‘자기 그림자에 반한 정물’이라 폄훼 당한 시인의 제 시에 대한, 제 그림자에 대한 불현듯 치밀어 오른 사랑 노래라는 것. 이렇게 생생히 붉고 두근거리고 일렁이는데, 채굴꾼들은 왜 ‘파헤쳐도 도무지 아무것도 없’다는 걸까? 다툼이야 늘 있던 거지만…. ‘망설임 속에서 놓일 자리를 찾는 바둑알의 심정으로’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 나, 오늘의 채굴꾼은 동업자로서, 정교한 표현들이나 긴 호흡이 부럽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걸 그냥 음미하지 못하고 이렇게 ‘공부’ 비슷한 걸 하누나. 문학집배원 황인숙 / 출처 :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