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인,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낭송 박경미)
김경인,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
선생님, 여기는 국경입니다.
어두운 밤 희미한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처럼
나는 몇 개의 선이 다시
정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요, 다툼은 늘 있죠.
눈을 감으면 하얀 종잇장 위로
눈과 코와 입이 점령군처럼 몰려오고
나의 손은 속수무책 들끓습니다.
어제의 채굴꾼들은 일손을 놓고 말합니다.
파헤쳐도 도무지 아무것도 없어,
산산조각 난 거울 조각이구나
자기 그림자에 반한 정물이구나
너의 핏줄은 나의 것처럼 붉고
너의 심장은 내 안에서 두근거린다.
너의 바닥에서 일렁이는 저것은 무엇인가
너의 유물은 무엇인가
선생님, 진심을 다해
당신과 피를 나누고 싶어요.
모든 색깔을 다 먹어치우고 검정을 이해하게 된 물고기처럼
그러나 사실은 검정을 모르는 물고기처럼
여러 개의 표정이 얼굴 위에 앞다투어 떠오를 때
두려움을 감추려 더욱 잔인해지는 병정들을
일사불란하게 다뤄야 하는 장수처럼
당신은 나의 아슬아슬함 속에.
빛과 어둠이 섞이는 은회색의 혼돈을 친화라고 부르듯이
모래알과 모래알이 서로를 모르는 채 해변을 완성하듯이
당신이라는 먼지 속에서
나는 떠오르면서
먼 초록이 가까운 초록을 다 잊기까지
망설임 속에서 놓일 자리를 찾는 바둑알의 심정으로
색깔 안에 나를 구겨 넣는 시간입니다.
선생님, 여기는 국경입니다.
이제 곧 그어질 몇 개의 철책 속에
나는 가득 담기고
나는 비로소 다시 태어나고
나는 나의 바깥을 향해
빙긋 웃습니다.
총을 겨누듯이
● 시_ 김경인 -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다.
시집 『한밤의 퀼트』『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 낭송_ 박경미 - 성우. 라디오 드라마 <파한집>, 마당극 <신흥부놀부뎐> 등에 출연.
● 출전_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민음사)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김태형
김경인,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을 배달하며
시의 다른 부분과 어우러지지 않는 듯한 4연을 읽고 또 읽어본다.
너의 핏줄은 나의 것처럼 붉고
너의 심장은 내 안에서 두근거린다.
너의 바닥에서 일렁이는 저것은 무엇인가
너의 유물은 무엇인가
갑자기 이게 웬 애먼 말씀일까…. 처음엔 난감했는데, 두 가지 해석의
눈과 코와 입이 떠오른다. 그 중 아슬아슬한 해석은, 이 뜬금없어 보이는
구절이야말로 이 시의 단서라는 것이다. 시인이 숨기고 있는, 정작 하고 싶었으나
참고 참았던 말이라는 것. 그 경우, 다른 부분들은 4연에서 기인한 화자의 불안하게
들끓는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이 지금까지 믿었던 선을 다 지워버리고
나를, 그리고 우리(너와 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고 싶은 시간이 되는 셈이다.
좀 덜 아슬아슬하게 해석하자면, 4연은 ‘자기 그림자에 반한 정물’이라 폄훼 당한
시인의 제 시에 대한, 제 그림자에 대한 불현듯 치밀어 오른 사랑 노래라는 것.
이렇게 생생히 붉고 두근거리고 일렁이는데, 채굴꾼들은 왜 ‘파헤쳐도 도무지
아무것도 없’다는 걸까? 다툼이야 늘 있던 거지만….
‘망설임 속에서 놓일 자리를 찾는 바둑알의 심정으로’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
나, 오늘의 채굴꾼은 동업자로서, 정교한 표현들이나 긴 호흡이 부럽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걸 그냥 음미하지 못하고 이렇게 ‘공부’ 비슷한 걸 하누나.
문학집배원 황인숙 / 출처 :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