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저녁에 나무는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다 /박주택

cassia 2012. 6. 30. 03:49

 

저녁에 나무는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다

 

박주택

 

나는 식탁에 앉아 느릿느릿 오는 눈꺼풀에게

나는 소파에 앉아 느릿느릿 오는 허기에게

저녁에 나무는 긴 그림자를 늘어 뜨린다라는 구절을 읊어주고

비운을 딛고 고운 빛으로 오는 강이라는 구절을 읊어주고

시 천 편 속에 묻혀 있다 날아오르는 말들을 본다

나와 대적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저 어둠이다

어둠은 미성년처럼 굴지 않는다

어둠은 귀신이 머무는 것을 쫓지 않는다

나는 어둠이 거는 대꾸에 시큰둥하게 앉아

나로부터 비롯되는 과오가 무엇인지를

나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문 책에게 듣고자 꼬고 있던 다리를 푼다

나는 아침이 어둠에게 거는 말을 안다

어둠이 아침에게 당부하는 말을 안다

-월간 '현대시학' 2011년 8월호에서

 

그림 이수동

 

▶박주택=1959년 충남 서산 출생.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등.